북한-말레이시아 '인질 외교' 갈등…단교 치닫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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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사에 전례를 찾기 힘든 '인질 외교'가 시작됐다. 7일 북한이 김정남 암살 사건으로 외교 갈등을 겪고 있는 말레이시아를 겨냥해 자국 내 말레이시아 국민의 출국을 일시 금지한다고 발표하자, 이에 맞서 말레이시아도 자국 내 북한 국민 전원의 출국을 금지했다. 사실상 상대국 국민들을 자국 내에 잡아놓고 인질로 삼은 셈이다. 그동안 상대국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주재 대사를 추방하는 등 수위를 높여 왔던 양국 간 외교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北 "북한 내 말레이시아 국민 출국 금지" #말레이시아도 북한 국민 출국 막기로 #"북한 측 결정은 우리 국민 인질로 잡은 것"

강철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가운데)가 6일 오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청사에 들어서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김정남 피살사건 수사와 관련, 말레이시아 주권 침해 언행을 한 강 대사에게 이날 오후 6시(현지시간)까지 출국하라는 ‘추방 명령’을 내렸다. 강 대사는 중국 베이징행 비행기편으로 출국했다. 강 대사의 출국 직후 북한 외무성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모하멧 니잔 모하맛 북한 주재 말레이시아 대사를 추방한다고 밝혔다. [세팡 로이터=뉴스1]

강철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가운데)가 6일 오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청사에 들어서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김정남 피살사건 수사와 관련, 말레이시아 주권 침해 언행을 한 강 대사에게 이날 오후 6시(현지시간)까지 출국하라는 ‘추방 명령’을 내렸다. 강 대사는 중국 베이징행 비행기편으로 출국했다. 강 대사의 출국 직후 북한 외무성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모하멧 니잔 모하맛 북한 주재 말레이시아 대사를 추방한다고 밝혔다. [세팡 로이터=뉴스1]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의례국을 인용해 “해당 기관의 요청에 따라 조선(북한) 경내에 있는 말레이시아 공민들의 출국을 임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을 주조(주북한) 말레이시아 대사관에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또 "(기한은)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이 공정하게 해결되어 말레이시아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교관들과 공민들의 안전담보가 완전하게 이루어질 때까지"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그동안 김정남 암살 사건에 대해 "문제의 사망자는 심장마비로 숨진 것"이라며 김정남이 맹독성 신경작용제 VX로 살해당했다는 말레이시아 측의 수사 결과를 전면 부인하고 시신 인도를 요구해왔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와 달리 북한 주재 말레이시아 대사관 측은 북한의 출국 금지 결정을 통보받지 못했다고 일본 NHK는 보도했다. 북한 주재 말레이시아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이날 NHK 인터뷰에서 "북한 정부로부터 출국 금지에 대해 연락을 받은 바 없다. 인터넷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외교부에 따르면 현재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인은 북한 주재 대사관 직원 3명과 그 가족 6명, 유엔세계식량계획 관계자 2명 등 총 11명이다.

예상치 못한 북한의 출국 금지 조치에 말레시이아 정부는 분주해졌다. 이날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북한 내 자국민의 안전을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라작은 회의 직후 성명을 통해 "말레이시아 국민의 출국을 금지한 북한 측 결정은 우리 국민들을 인질로 잡은 것으로 국제법과 외교 관계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라며 "북한에 체류 중인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말레이시아 내 모든 북한 국민의 출국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말레이시아에는 1000여 명의 북한 국민이 거주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말레이시아 측은 자국 내 북한대사관 폐쇄 등 단교 수순을 밟는 분위기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날 정오께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은 쿠알라룸푸르에 위치한 북한대사관 정문에 저지선을 치고 주변 도로를 차단하는 등 대사관 출입을 전면 봉쇄했다. 아흐마드 자히드 하미디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8일 내각 회의에서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 폐쇄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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