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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레프트, 이념에서 정책으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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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25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옆 커피숍에서 만난 김형기(53.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요 며칠 새 우리 지식사회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인사가 됐다. 그가 공동대표를 맡아 17일 출범한 '좋은정책포럼'이 한국판 뉴레프트(신진보)의 본격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언론에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럼 출범 후 일주일 새 이런저런 제안의 전화와 e-메일이 잇따랐다고 했다. "그게 쉽게 되겠느냐"며 회의적 시선을 던지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반적 반응은 호의적이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품었던 이들은 네트워크를 형성하자고 제안했고, 보수적 성향의 인사들은 쟁점토론을 하자고 나섰다. 보수 지역으로 손꼽히는 대구의 많은 이도 긍정적 관심을 전해 왔으며, 포럼에 참여할 뜻을 밝힌 이도 많다고 한다.

관심의 정도가 이렇게 높은 배경은 무엇일까. 노동경제학을 전공했고 한때 노동운동에도 관여한 그의 이력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향한 386 운동권 출신들이 뉴라이트(신보수)를 만들어 보수 진영에서 새 바람을 주도하는 상황 아닌가. '유연한 진보' 혹은 '실용적 진보'의 등장을 기다렸음을 방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소모적 이념 정쟁에 식상한 이들일수록 이념의 경직성을 벗어던진 뉴레프트가 등장했다고 하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만큼 그 실체가 궁금했을 것이다. 나아가 뉴레프트와 뉴라이트가 정책 대안 경쟁을 벌이며 토론 수준을 격상시키고, 우리의 정치문화와 국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주기까지 기대하게 된 것이다. 일주일 새 벌어진 일들이다. 당장 내년의 대선은 정책 경쟁의 대토론장이 될 것이란 성급한 예측도 나온다. 지역감정이나 제왕적 보스에 의해 끌려 가던 선거와는 다른 양상이 전개되리라는 전망이다.

뉴레프트의 등장은 예고된 것이었다. 멀리는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가깝게는 지난해부터다. 90년대 들어 세계적 탈냉전 분위기 속에 한국 운동권 핵심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이미 사회주의가 대안이 아님이 논의됐다. 노동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식의 관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해는 진보의 성과에 대한 반성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두 차례의 대선에서 진보 계열이 승리했지만 진보 계열의 존재에 대한 위기의식은 날로 고조됐다. '무능한 진보''얼치기 진보'라는 비아냥 속에 진보의 긍정적 가치마저 모두 조롱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한 진보 성향 학자들의 자괴감은 커져 갔다. "비판을 하지 못하면 결국 어용 학자 아닌가"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농담 속에 오가기도 했다. 현 정부가 실패하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는 안타까운 고민이 시작됐다. 이런 가운데 보수 쪽 뉴라이트의 약진은 위협적인 것이었다. '지속가능한 진보'란 선언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보수의 전유물이던 시장경제의 역동성과 성장 동력을 강조하고, 북한의 인권 등 한국 진보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문제에 침묵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이제 보수고 진보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지속가능할 수 없는 시대다. '뉴'자 계열의 공통 구호는 이렇다. 이념에서 정책으로!

배영대 문화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