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제재의 힘… 북한 4개월 만에 타협 선회 신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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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위폐 제도 등의 혐의를 내세워 대북 금융제재에 착수한 지 4개월 만에 북한이 '타협'으로 선회하는 듯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중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의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할 의지엔 변함이 없지만 여기엔 난관이 있다"고 한 게 그것이다. 미국의 압박에 벼랑 끝 전술로 대응해 왔던 그간의 태도와 비교하면 꽤 수세적이다. 대북 전문가들은 "돈줄을 막으니 협상하자고 나오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 효과 만점 금융제재=금융제재에 북한은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미국 입장은 분명했다. 지난해 11월 5차 6자회담에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이 문제를 거론하며 미국을 비판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연말로 예정됐던 김 부상의 방미 협상을 거부하며 '위폐 문제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북한 노동신문이 3일 "미국이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6자회담에 참가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틀 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금융제재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지시"라고 꿈쩍도 안했다. 결국 북.중 정상회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의 '수세적' 발언이 나오게 됐다.

북한은 을지포커스렌즈(UFL) 연습과 같은 한.미 군사훈련, F-117 전폭기 배치와 같은 주한미군의 전력 증강엔 강경발언을 쏟아내며 '힘에는 힘으로 대응한다'고 별러왔다. 그러나 마카오의 한 해외 은행과의 거래 중단을 놓고는 '손을 든' 모양새가 된 것이다.

◆ 왜 먹혔나=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마카오 은행에 대한 금융제재가 시작되자 중국은 물론 네덜란드와 스위스 금융기관들까지 몸을 사렸기 때문"이라고 했다.'시범적 손보기'의 여파가 몇 안 되는 북한 해외 거래 은행들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 당국자는 "국제 금융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중국도 위폐 문제에 대해선 북한에 냉랭하게 대한 것 같다"고도 했다.

금융제재의 효과가 큰 이유는 북한의 독특한 통치체제와 고립된 경제체제 때문이다. 김영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외 은행이 거래를 끊으면 북한은 국내로 달러를 송금할 방법이 없어진다"며 "그렇게 되면 당장 2월 16일 김 위원장의 생일 때 당.군 간부와 인민에게 나눠줄 선물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라고 했다. 정부에 따르면 해외에 나가 있는 북한 은행의 지점은 10곳도 되지 않는다.

북한 은행 지점은 충분한 송금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이번 금융제재가 북한 내각이 아닌 당이나 군이 상대하는 해외 은행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통치자금의 기반이 흔들렸다는 의미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금융제재와 레이건 행정부의 대 소련 정책의 비교도 나온다.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레이건 행정부가 소련과 군비 경쟁으로 대결했다면, 부시 행정부는 금융제재로 북한을 압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고, 국내 생산도 한계에 봉착한 북한에는 작은 경제제재라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향후 북.미는=대북 전문가들은 미국이 '정권 차원의 범죄가 아닌 실무자들의 책임'으로 마무리하려는 중국의 중재에 어떤 선택을 할지가 관건이라고 본다. 김성한 교수는 "미국은 금융제재 카드를 유지하는 데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반면 금융제재가 계속되면 하위 문제인 위폐.마약 때문에 상위 현안인 북핵 논의가 가로막힌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정부 일각에선 금융제재 해결에 진전이 없을 경우 북한이 핵 위기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한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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