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공권력 올바로 행사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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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작년 8월 개각이전의 증앙모부처 국장 K씨. 부처안에서 「부장관」으로 통했다.
같은급의 국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물론 차상위급들도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피고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썼다.
K국장에게 정부조직법에도없는 「부장관」 이라는 별명이 붙은것은 그가 장관의 제일가는 심복이었기 때문. 제도상의 직책으로야 차관·기획관리실장밑의 국장급가운데 한사람이었지만 장관의 신임이 남달라 실질상 장관다음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2인자라는 비꼼이었다.
결국 개각으로 장관이 자리를 뜨는 것과 함께 그같은 별칭도 사라졌지만 직책을 넘어선 월권의 사례로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정부는 지난 84년, 25개 정부투자기관에 갑자기 이사장자리를 만들어 거물인사들을 앉혔다. 집행기관과 의결기관을 분리시켜 서로 견제·협조해 나가면서 경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실제 임명된 인사들의 면면을 훑어봐도 해당기업체의 업무와 어울리는 전직을 가진 사람은 겨우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 나머지는 퇴직해 쉬고있던 전직 장·차관또는 예비역 장성들이었다. 이때문에 이사장 임명은 경영의 합리화라는 제도에 목적이 있었던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 만든 「위인설관」이었다는 세평을 들었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현대사회의 기능을 갖가지 제도가 지탱하고 지배하는 사회를 말한다. 사람이 제도를 운영하지만 권리와 의무를 법률로 규정하고 법의 테두리안에서만 권리를 행사하도록 재량권을 최소화시킨다.
민주주의가 사람보다 제도를 통한 행정에 역점을 두는것은 많은 사람의 중지를 모아 행정을 한다는 의미와 인물위주의 행정에서 오는 월권과 특정인의 전횡을 막는다는데 큰뜻이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에서는 아무리 고위 공직자라 해도 법과 제도의 규제를 받기는 하위직과 마찬가지다. 「닉슨」대통령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자리에서 내몰린것이나 최근 「레이건」대통령이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는것도 모두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다른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을 정도의 인물위주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힘있는 부서장이 취임하면 직원들의 사기가 오른다. 웃사람의 명령이면 팥으로 메주를 쑤라고해도 흉내를 낸다.
실력있는 장관이 오면 기구와 인력이 늘어난다. 2급으로 보임되는 자리에 사람에 따라1급을 앉힌다. 엄연히 허가·인가·민원처리 규정이 있건만 무시할수 없는 고위층이 청탁을 하면 일사천리로 처리된다.
실력자의 쪽지나 전화 한통화면 당일로 은행돈을 빼낸다….
85년 11월 서울망원동의 한 주택업자가 서민용 연립주택 1동을 짓는데 9개월동안 자그마치 1백차례에 걸쳐 2천2백만원의 돈을 관청·은행·공갈배에게 뜯긴 사실이 드러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가운데 관청은 관할구청의 건축과·주택과·도시정비과·경찰서·파출소·동사무소에서 때도없이 찾아와 돈을 줄수밖에 없었으며 자재대금이 없어 쩔쩔매면서도 「봉투」를 준비해 두지않으면 공사를 할수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시민의 생활을 돕는 제도인 구청·경찰서·은행·동사무소가 제도의 범주를 벗어나 사람의 손에 놀아난 꼴이 아닐수 없다.
대검이 작성한 「86년종합심사분석」에 따르면 작년한햇동안 공무원이 직권남용등 직무와 관련된 비위로 입건된 사람은 1천1백67명으로 전체공무원범죄(6천8백87명)의 16.9%였다. 이가운데 직권남용부문이 5백54명으로 85년의 2백91명보다 90%나 늘었고 독직이 42명으로 역시 23.5%, 1백만원 이상의 뇌물을 받은경우가 81명으로 20.9%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공화당시절의 청와대비서실을 소내각이라고 불렀다. 국무총리밑에 엄연한 내각이 있고 부처마다 장관이 있었지만 중요한 결정은 청와대 비서실에서 내렸기때문에 붙은 이름. 이때문에 각부처는 국민을 위한 행정보다 소내각의 구미에 맞는행정을 하지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제도가 유명무실한채 제구실을 못하는 경우는 지금도 많다.
정부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정책에 반영한다는 취지로 설립해 놓은 각종 위원회가 3백75개, 총리실 직속만해도 25개, 그러나 총리주재로 회의를갖는 경우는 연간 통틀어 단몇차례에 불과하다.
박종철군 사건뒤 설립된 인권보호특별위원회는 단한번 열렸으나 의제선정도 못한채 회의를 끝냈다. 지자제 연구위원회는 위원들이 해외여행까지하며 자료를 수집해 안을 제시했으나 당정협의에서 원칙을 정함으로써 헛수고만 한 꼴이 됐다. 기존제도가 제기능을 잃거나 다른 방향으로 갈때의 부작용은 심각하다. 민주화선언을 했다고 백령도로 발령난 교사나 특수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다가 고문치사를 당한 박종철군이 좋은예.
만일 교육위원회나 경찰이 법규의 틀을 벗어나는 비정상적인 발상을 하지 않고 기존제도의 범위를 지켰다면 이와같은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백완기교수 (고려대·행정학)는 『우리의 행정이 해방후 서구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상당한 구색을 갖춘것은 사실이나 그운영을 인물중심으로 해오다보니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공권력의 올바른행사와 공무원의 부당한 월권·직권남용을 막기위해서는 앞으로 제도행정의 묘를 살려야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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