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는 교무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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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29면

새해가 되면 기러기 떼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간다. 또는 길을 잘못 들은 청둥오리들이 서쪽에서 동쪽 하늘로 아름답게 하늘 끝자락으로 떠나간다. 인간들은 새를 바라보며 “그저 새들이 자기 길을 찾아 목적 없이 떠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갈 길이 분명히 있다.


며칠 전에 선후배 동지들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새해가 되면 6년 임기가 다 된 교무들은 자신의 근무지 교단의 명에 따라 조용히 떠나고 들어온다. 이때가 되면 예전에 선배들의 말처럼 기러기들이 떼를 지어 삼삼오오 어디론가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다고 빗대어 말씀하시곤 했다.


한 근무지에서 교도들과 짧은 6년의 인연도 교단의 명령이라면 두말없이 개인의 짐 보따리를 챙겨 떠나는 것이 원불교의 전통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도가(道家)의 풍경’이기도 하다.


어떤 교무는 도시의 번화한 교당으로, 어떤 동지는 사람 구경이 어려운 산골짜기 교당으로 임지발령이 나지만 그게 나의 운명이고 길이다. 일찍이 버릇이 된 ‘도(道)꾼’들은 서로 희희낙락하며 새 교당 임지에 도착하고 새 터전에 자신의 짐을 푼다. 그중 어떤 교무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정든 교당을 나서기도 하고, 어떤 교무는 취미로 모아둔 몇 권의 책을 들고 나선다.


몸과 마음이 가벼울수록 삶이 담담하듯이 우리가 애써 꾸미고 일군 명예와 권세도 알고 보면 한갓 티끌처럼 보이기도 gks다. 한문에서 업(業)이란 흔히 직업을 말하지만 종교인들은 무업(無業)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자신을 비우기 위해 새벽좌선으로 마음을 비운다.


어떤 교무는 설교를 잘해 감동을 주는 업을 쌓기도 한다. 목탁을 잘 치는 훌륭한 업을 지니거나,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유기농 쌀을 짓는 교무도 있다. 나같이 대학 박물관에서 옛날 유물을 만지작거리고 미술품의 전시기획하는 업을 가진 교무도 있다.


똑같이 세상의 그 많은 직업이 있지만 나름대로 다 소중하고 숭고한 업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내가 30년 전 출가하여 초임 교무였을 때부터 내 마음속에 차분히 머무는 한 줄의 글이 있다. “몸은 천하(天下)의 뒤에 서서 일하고 마음은 천하(天下)의 앞에 서서 일할지니라” 라는 종법사님의 법문 말씀이다. 이 말씀은 세월이 지나도 내 삶의 기준이 되어 있는 삶의 기도가 됐다.


또 한 가지 소중한 말씀은 “법(法)을 위해서는 신명을 다 바치고 공(公)을 위해서는 개인의 사사로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한 종교에만 국한되는 일인가” 하고 오늘날 세상에 묻고 싶다.


나라 법(法)을 함부로 어기며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챙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위가 비록 크게 보일지라도 그를 지켜보는 많은 국민은 안타깝고 걱정스러울 것이다. 예부터 종교와 정치가 길은 달라도 세상의 장터에서는 한 오솔길에서 만나게 되고, 겨울 지나 매화꽃이 강물에 떠내려 가면 함께 바라보는 마음의 이치도 같기 때문이다.


정은광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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