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소설 『유리알 유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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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물질문명 속에서 「정신」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정신」이란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일까. 「정신」은 과연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일까.
「헤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는 이같은 의문들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려 11년동안 고심한 끝에 완성된 이 소설은 나치스에 대한 증오와 저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20세기의 타락한 물질문명에 대한 예언적 비판서라는 점에서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리알 유희를 통해 절대가치로서의 「정신」을 공기처럼 마시고 사는 카스타리엔주의 소년 「크네히트」는 곧 정신의 위대함을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정신의 무력함에 괴로와하는 「헤세」자신의 모습이다.
사실 정신이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유리알 같은 것일까. 마치 더이상 채울수 없이 가득 찬 그릇에 물 한방울이 떨어지자마자 그릇이, 아니 전 우주가 흔들리고마는 것처럼.
「헤세」는 대표적으로 전쟁을 보고 있다. 물질문명이 가장 파괴적인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곧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이 그토록 절대적인 것으로 믿었던 모든 가치를 빼앗아간다. 그러나 작가는 그같은 죄악과 절망을 겪은 후에 비로소 참다운 정신의 힘을 믿는다.
「크네히트」는 결국 유리알 유희의 정신을 지상으로 가져오기 위해 환상의 땅 카스타리엔주를 떠나는 것이다.
동시에 「크네히트」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정신이 죽음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어지러운 물질문명 속에서 과연 무엇이 절대가치인가 하는 괴로운 의문을 떠올릴 때마다 「헤세」의 유리알은 문득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장경숙 <광주시 서구 광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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