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는 변할 수 없는 시대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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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즘 정치 되어가는 꼴을 보면 비감한 마음을 금할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허무하다는 생각마저든다. 1년이 넘게 민주개헌의 성사를 위해 이모저모로 촉구해온 처지에서는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하는 우리 정치의 부임성에 분노와 절망을 느낄 뿐이다.
권력의 향배가 걸린 개헌이란 삼엄한 문제가 여야간의 대화와 협상으로 쉽게 풀리리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호헌만이 살길이라는 집권측에 개헌원칙을 받아들이게 하는것부터가 지난하리라 보았다. 또 집권측이 개헌원칙을 방아들이더라도 협상과정에서 몇차례 결렬의 고비를 겪는 우여곡절을 거쳐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권측은 예상보다 쉽게 현대통령 임기내 개헌원칙을 받아들였다. 반면 협상으로 물건을 만들어내야할 여야 정당들은 직선대통령제다, 의원내각제다 하고 싸우느라 협상 테이블에도 못가본채 급기야 개헌논의 중단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강력한 대통령제에 델만큼 덴 야당의 직선대통령제 고집이나, 별로 당체질에도 걸맞지 않은 집권당의 의원내각제 주장은 아이로니컬하지만 그나름의 현실적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야정당과 몇몇 정치인들에게는 절박한 사정일지 몰라도 국민들의 생각은 결코아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공정한 선거를 보장하는 보다 민주적인 헌법을 가져야겠다는 소박한 소망뿐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특정 권력구조에 대한 선호야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면 아예 개헌이 안돼도 좋다는 생각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절에 집착하다 대국을 그르친 여야 정치인들의 책임을 준엄하게 물어야한다.
우선 개헌을 앞장서 요구했으면서도 막상 집권측의 개헌 용의를 개헌성취로 연결시키지 못한 야당의 무실이다.
집권측의 입장에서 보면 현행헌법은 가장 편한 헌법이다. 가급적이면 고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런 편한 헌법을 고치겠다고 물러섰으면 딴소리하지 않도록 갈 구슬려 몰아가는 것이 야당의 정치력이다. 집권측이 개헌을 한다고 했다해서 권력을 당장 내줘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주지 않기 위해 그일부를 주려했다고 봐야한다.
그런 상대에 대해 일거에 정권을 내놓게 하기 위해선 직선제여야 한다면서 그외의 길을 모두 막았으니 그결과는 보지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야당안의 두 큰세력이 직선제로 향해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하나 둘 건너가면서 개헌에의 희망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활동이 규제된 사람으로선 자기가 끼지 못하는 정치를 계속 꼬이게 하고 상대방을 멍들게 하는것으로 자기 힘을 과시하려는 유혹에 빠질수도 있다. 그런 행동이 한정객으로서 정치 책략에 능하다는 소리를 듣게될 일일지는 몰라도 정치 지도자로서 취할 자세가 아님은물론이다.
그보다 더 한심한 행태를 의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눈앞의 헛된 욕심과 비토그룹 눈치때문에 대화와 협상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는 경우에서 본다.
모처럼의 개헌기회를 놓치고만 야당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행태를 놓고 과연 이나라의 진운을 이들에게 기대할수 있겠느냐는 회의가 번져가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한때 정치의 양을 잃는 고난까지 겪었으면 뭔가달라지는 데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사태에 대한 책임의 일단이 이렇게 야당에도 있지만 역시 기본 책임은 집권측이 질수밖에 없다. 당장은 하겠다는 개헌도 받아먹지 못하고 분당극을 벌인 야당에 비난이 쏠리지만 시간이 가면 결국 국정주도의 책임을 지는 집권측에 책임추궁이 더 돌아가게 마련이다.
야당의 비타협노선에도 문제가 있지만 합의개헌을 고창해온 여당측은 과연합의를 이룩하기 위해 그동안 한 것이 무엇인가. 집권측에선 당초의 호헌입장을 바꿔 의원내각제 개헌까지간 것 만으로도 크게 양보한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는듯하다. 그러나 집권당의 개헌노력은 그저 그것으로 그친감이 있다. 대화를 하자, 협상을하자, 합의개헌을 하자는 말은 계속했지만 막상 야당을 상대로 협상파를 강화시키려는 구체적인 노력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대화는 변두리에서 맴돌았고 이민우구상같은 야당내의 긍정적 신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도 여야 합의개헌의 전망이 지극히 어두운건 사실이지만 야당과의 마지막 담판조차 없었던데 대해선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작년 집권측이 호헌에서 개헌으로 갈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별로 변한 것이 없다. 그런 형편에서 개헌보류는 그자체가 큰 불안요소를 안고있다고 봐야한다. 3저등 국운이 크게 뻗을 수 있는 이 모처럼의 기회가 흔들리게라도 되지 않을까 적정이다.
그동안은 안정 속에 점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개량주의자들이 합의개헌이란 명분을 가지고 여론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개헌유보로 이들의 설 땅과 명분이 사라져버렸다. 이들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체제의 강경론자와 민중혁명론자의 목소리만 커질 가능성이 있다. 이점이 정치불신의 심화와 더불어 가장 심각히 우려되는 점이다.
정치권의 형편이 어떻게 달라지든 민주화는 이 시대의 변함없는 정신이다. 그 정신을 구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언제 이뤄지든 민주개헌이라는 것도 변할 수 없는 시대적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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