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일생 마친 비운은 황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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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조선조 비극의 황녀인 이문용 할머니가 28일 하오 5시 30분쯤 노환으로 거처하고 있던 전북 전주시 토창동 경기전 조경묘 수직사에서 87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홍석표 전북 지사를 비롯해 육종진 전주 시장 등 각급기관·단체강과 시민들이 빈소를 찾았다.
장례는 전주리씨 종친회의 장례 위원회 (위원장 이춘기·국정 자문 위원) 에서 5일장으로 결정, 4월1일 장례위원회장으로 치른다. 장지는 조선조 태조의 4남 회 안대군의 묘소가 있는 전북 완주군 용진면 법사산 종산.
1900년12월3일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염 상궁의 몸에서 태어난 할머니의 일생은 조선말기의 암울했던 역사의 그늘에서 살아온 비운의 황녀.
이 할머니는 태어나면서부터 비운의 첫발을 디뎌야했다. 엄비의 질투를 피해야했던 것. 당숙인 학부대신 이재곤의 주선으로 시녀와 함께 경북 김천 방앗골로 피해 9살 때까지 숨어 살아야 했고 10살 때 염 상궁과 가까이 지내던 임 상공이 서울로 데려갔다.
창경원 앞 원남동 한 여염집에 숨어 살면서 궁중 예절과 법도를 배울 때야 자신의 신분을 알았던 이 할머니는 17세 때 우국지사 김한국의 아들 김희진과 결혼을 했고 진명 여고에 진학, 신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3살 아래인 남편은 결혼 직후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사별, 청상 과부가 됐고, 같은해 돌도 채 안된 외아들마저 잃는 불행을 겪었다.
게다가 일본 경찰들의 왕족 및 그 후손들에 대한 검거로 더 이상 국내에 머무를수 없게되자 중국 상해로 피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귀국한 이할머니는 시댁이 있는 원산으로 내려가 두 시동생을 데리고 서울 명륜동에 생활 터전을 잡을 무렵 간첩 누명으로 옥살이를 해야했다.
이북에서 좌익 운동을 하던 시동생이 생활비에 보태 쓰라며 갖다준 금덩이가 말썽을 빚었던 것.
서대문 구치소에서 2년간 미결수로 지내다가 50년 6월 출감했으나 출감 5일만에 6·25가 터졌다. 부산으로 피난 갔던 이 할머니는 휴전이 될 때까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휴전 후 서울 명륜동 옛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이 할머니는 조용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강원도 강릉으로 내려갔다가 신세 타령 끝에 자신의 신분이 노출돼 집주인의 밀고로 60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10년을 선고 받아 전주에서 옥살이를 하게 됐다.
교도소에서는 자수를 배우며 모범수로 지내던 중 캐나다 선교사 구미애양 (미스 캐논)을 만났다.
구양의 인도로 기독교에 귀의한 이 할머니는 고백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신분은 물론 지내온 일들을 숙김없이 털어놓았다.
구양은 7O년 형기를 마치자 전북 이리에 셋방을 얻어 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 같은 사실은 74년 작가 유주현씨에 의해 드라머로 만들어져 MBC에서 『황녀』라는 제목으로 방영, 세상에 알려졌다.
이환의 전북 지사는 이 할머니를 이태조의 영정이 봉안된 전주시 풍남동 경기전 수직사에 거처를 마련해줬고 매달 도비와 시비에서 각각 15만원씩 3O만원의 생활비를 지원,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던 어려움은 덜게됐다.
그렇지만 혈혈단신 이 할머니의 생활은 외로왔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던 그날도 부엌일을 도와주던 이강님 할머니 (68)만 임종을 지켰다.
한때 『황녀다』, 『아니다』라는 시비도 있었지만 전주 이씨 종약원 전주 지구 이병희 회장 (73)은 『문 중에서도 시비가 있었지만 황녀로 인정, 꾸준히 보살펴 왔다』며 『한 인간의 기구한 생애를 통해 대한 제국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의 일생은 자신의 입을 통해 80년 전북대 김유달 교수에 의해 『굽이 굽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이름의 책자로 발표되기도 했다. <전주=모보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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