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쟁반·우산꽂이서 만난 포르나세티의 상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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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손목에서 잘린 손들이 출렁인다. 엉덩이는 꽃병으로 둔갑했다. 여인의 얼굴은 쟁반으로, 커피 잔으로, 접시로, 우산꽂이로 변주된다. 이탈리아 조형예술가 피에로 포르나세티(1913~88)는 그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으로 톡톡 튀는 초현실주의적 감각의 작품을 생산했다. 그는 디자이너 이전에 고감도의 시인이었고, 손보다 머리와 가슴이 승한 장인(匠人)이었다. 생전에 포르나세티가 남긴 작품론은 그가 추구했던 높은 경지의 이상향을 엿보게 한다.

포르나세티가 생산한 우산꽂이를 보여주는 ‘우산을 위한 공간’.

포르나세티가 생산한 우산꽂이를 보여주는 ‘우산을 위한 공간’.

“나는 도자기, 가구, 물건 등 나의 거의 모든 작업에 있어서 작은 이야기나 재미있는 메시지들을 숨겨 놓곤 한다. 이것들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시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마음의 눈으로 읽힐 것이다.”

서울 DDP서 특별전 열려
20세기 초현실적 조형 예술가
밀라노서 가져온 1300여 점 전시

22일 서울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막한 ‘포르나세티 특별전’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금세기에 독특한 디자인 영역을 개척한 한 예술혼을 조명하고 있다. 1913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평생 화가·조각가·판화가·디자이너·수집가·스타일리스트·갤러리스트 등으로 활약하며 1만3000여 점이 넘는 오브제와 장식품을 디자인하고 제작한 그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아들인 바르나바 포르나세티가 ‘아이콘’ ‘형이상학의 방’ ‘우산을 위한 공간’ ‘트레이, 꿈을 담아내는 방법’ ‘주제와 변형들’ 등 주제를 잡아 구성한 14개 방은 세상을 에둘러 보여주는 판도라 상자처럼 흥미진진하다.

오페라 가수 리나 카발리에리의 얼굴을 접시와 영상으로 꾸민 ‘주제와 변형들’ 방.

오페라 가수 리나 카발리에리의 얼굴을 접시와 영상으로 꾸민 ‘주제와 변형들’ 방.

포르나세티가 평생 집착했던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가수 리나 카발리에리(1874~1944)의 얼굴은 350여 가지가 넘는 변형으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주제와 변형들’ 섹션에 전시된 그의 얼굴은 모빌처럼 실에 매달린 접시들이 폭포처럼 관람객을 맞으며 다양한 동영상과 함께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자, 삶을 즐겨라”라고 말하는 듯 유쾌하고 정열적인 감각을 퍼뜨리는 전시물들은 한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재미난 곳이란 영감을 던져준다.

그동안 포르나세티의 작품은 주로 특정 상표의 디자인 제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바르나바 포르나세티는 “아버지 예술혼의 내면이 그 상품 밑으로 가라앉아 간과되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선친 작품의 학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의 예술 영감을 한국인들과 공유하고 싶어 아시아 첫 전시 장소로 서울을 택했다”고 말했다.

밀라노에 설립된 ‘포르나세티 아카이브’에서 가려뽑은 1300여 점 전시품은 유행과 주류를 거슬러 올라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으며 독창성에 미친 듯 탐닉했던 한 인간의 발자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물건과 사랑에 빠지고, 소유한 뒤 몇 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영감을 받아 더 나은 경지로 창작하는 컬렉터의 편집증이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전시는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19일까지(월 쉼). 24세 이상 1만 5000원, 24세 미만 1만 원. 1522-3763.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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