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까지 갈 노선차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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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정당이 노선투쟁을 벌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집권하지 못한 야당에선 더구나 그 소리가 크게 마련이다.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영국노동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노선과 관련해 홍미로운 사이클을 볼수 있다. 당노선이 보다 좌경화하는 것과 집권당으로서의 위치를 잃어가는 시기가 대체로 일치한다. 야당이 된뒤 상당기간까지도 그러한 좌파적 당노선은 지속된다. 한동안 야당을 하다보면 보다 현실적인 중도 우파세력이 힘을 얻게돼 당의 온건화가 이뤄지는 노선투쟁이 벌어진다. 당의 지도부를 이들이 장악한뒤 얼마 있다가 다시 집권코스로 가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당이기 때문에 이념에 투철해야 한다는 내면적 요구와 다삭파가 되기 위해 국민에게 불안감이 아닌 신뢰를 심어야한다는 현실론간의 노선투쟁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노선투쟁 과정에선 탈당사태도 벌어지고 숙청당하는 세력도 생긴다.
노동당의 우파세력이 결별하고 나가 사회민주당을 만들었고 지난 1, 2년새에는 당노선의 온건화에 따라 좌파세력 일부가 숙청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외국의 예에서 보듯이 노선과 당권을 둘러싼 정당내부의 투쟁은 자연스런 것으로 무조건 매도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당내 진통은 역설적으로 내부 활력과 가능성의 증거일수도 있다.
따라서 요즘 제1야당인 신민당의분란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겠다. 잘만 소화해 내면 체질과 노선을 더욱 튼튼히 하는 계기도 될수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몇가지 유념해야될 것이 있다.
우선 무엇보다 당내투쟁이 단순한 세력다툼이 아닌 노선투쟁의 성격을 지녀야 하는데 그 점이 매우 부족해 보인다.
기본적으로 보수정당의 노선투쟁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주의정당인 영국의 노동당처럼 정책수단의 선택폭이 중요 생산수단의 국유화까지 갈 정도로 넓지 못하다. 기껏해봐야 재야 운동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형평에의 요구를 어느 정도까지 정책수단으로 수렴해 가느냐가 고작이다. 그나마 최근 신민당의 내분과정에서는 이러한 문제는 전혀 논란의 대상조차 되고 있지 않다.
그러면 남는 노선문제는 나라의 자유화와 민주화의 문제뿐이다. 이민우총재나 두김씨나 민주화를 하루빨리 이룩해야 한다는 목표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또 민주화를 위한 1차적 당면조치의 내용이란 면에서도 두김씨의 주장이 이총재의 7개항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렇다면 당의 노선이라 할수 있는 기본이념에 대해선 아예 차이가 날수 있는 「견해」자체가 뚜렷하지 않고,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목표와 그 내용에 관해서도 투쟁이고 뭐고 할만한 기본 간격이 없는 듯하다.
다만 한쪽은 직선 대통령제 개헌이 민주화의 핵심과제로서 직선제가 이룩되면 민주화는 저절로 된다는 선직선제에 집착하고 있는데 비해 다른쪽은 민주화가 되면 권력구조 문제는 부차적이라는 선민주화론으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양쪽의 견해 차이는 노선의 차이라기 보다 민주화의 목표를 이룩하는 방법과 순서에 대한 의견차이로 보인다.
당사자들에겐 이 정도의 의견차이도 중대한 의미가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거리를 두고보면 그 정도의 의견차이가 과연 분당을 각오하고 다툴만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의 기본노선에 관한 투쟁이라면 물론 분당이나 숙당까지 각오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되고 있는 민주화의 방법론에 관한 의견차이 쯤은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도 아직 야당내에선 허심탄회한 토론의 시도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토론을 원천 봉쇄하려는 힘의 무한과시와 체면에 얽매인 외고집뿐이다.
요즘의 신민당 형편을 보면 꼭 흉보면서 배운다는 말 그대로다. 야당이 정부·여당의 잘못된 작풍으로 비난하던 일들이 야당 안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말이나 논리보다 힘이앞서는 풍조, 언로를 활성화하기보다 억제하는 비민주적 행태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심지어 당내 절대다수파가 소수파를 겁주기 위해 분당론까지 들먹이고 있으니 야당이 그토록 여권의 협박이라고 비난하던「판쓸이」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당내투쟁에 동원되는 수단이 지나칠뿐더러 그 투쟁의 결과 또한 개헌정국에 임하는 야당의 선택폭을 좁힐 뿐이다. 그래서 사태가 수습되든, 분당사태로 이어지든 야당의 절대다수는 직선 대통령제에 더 묶이게 되어버렸다. 여야협상의 폭이 좁아지게 됐으니 자연히 합의개헌의 전망도 더욱 흐려지지 않겠는가.
합의개헌은 커녕 모양이 크게 흉하지 않은 합법개헌조차 어렵게 된다고하면 결국 한시적으로나마 현행헌법이 유지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금할 수 없다.
이런 결과는 집권당은 물론 야당도 정치적으로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중대사태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요즘의 신민당사태에 대해 여러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니 이총재가 의심스럽다, 두김씨가 너무하다, 양쪽이 모두 나쁘다는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다. 나이든 측에선 두김씨 비판이, 중년층 이하에선 이총재에 대한 비난이 보다 강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특정인에 대한 비판 강도는 엇갈리지만 모두 일치하는게 한가지있다. 전체로서 야당과 야당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사태를 악화시키기보다 한발짝씩 물러나 수습을 서둘러야 한다. 원한을 남기는 완승·완패의 해결이 아닌 조화와 화합의 길이 모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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