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마오쩌둥은 문혁 피바람 깃털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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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혁명후기
한사오궁 지음
백지운 옮김, 글항아리
408쪽, 2만원

중국 최고의 소설가 한사오궁
문화대혁명 기존 평가 뒤집기

중국의 문화대혁명(문혁·1966~76)에 대한 공식 평가는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한 극좌적 오류’다. 그러나 일반적 인식은 ‘악마들의 광란’ 이다. 마오가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광적 폭동이라는 거다. 서방의 평가 역시 후하지 않다. 서구 문혁학(文革學)의 창시자인 맥파커 하버드대 종신교수는 “이 운동의 절반 이상은 마오 개인의 책략 결과”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한사오궁(韓少功)의 생각은 다르다. 중국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이자 노벨 문학상 후보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그다. 그는 기존 문혁 평가를 ‘편협한 도덕 만능주의적 추궁’이라고 반박한다. 그가 펴낸 『혁명후기』라는 저서에서다. 2013년 중국에서 출판됐지만 검열 때문에 아직까지 중국 대륙에 상륙하지 못한 역작이다.

문혁에 대한 그의 시각은 사고의 혁신이자 역발상이다. 물론 치밀하고 사실적이며 논리적이다. 저자는 우선 문혁의 광기와 폭력에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수억 명의 민초들이 광란의 악인으로 폄하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사건은 항상 그 근저에 복합적 원인이 있는데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마오가 없었으며 문혁이 발생하지 않았을까”라고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과거 많은 학자들은 문혁을 영도자(마오쩌둥) 중심으로 사고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사회 저층에서 무엇이 발생했는지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 글항아리]

[사진 글항아리]

문혁이 한창이던 1972년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중국에서는 작황이 좋아지면서 잉여 생산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민초들이 살기 위해 (문혁같은)정치투쟁에 앞장 설 필요가 없었다. 동시에 빈부 격차 등 많은 사회 모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 이데올로기와 획일적인 권력체제가 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당연히 민초들의 분노가 있었고 이 분노는 마오의 권력욕과 융합하면서 광란의 폭력으로 확장됐다.

작가는 여기에 사실 하나를 더해 기존 문혁관을 비판한다. 1972년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 등 마오의 라이벌들은 이미 권력 변방에 있어 마오의 권력욕이 홍위병들의 폭력적 광기에 동력을 제공했다는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혁 기간에도 69년 확립된 마오의 절대권력은 위기를 느낄 만큼 손상되지 않았으니 마오가 문혁 피바람의 몸통이라는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작가는 오늘날 중국이 G2(미국과 중국)로 부상한 것도 문혁 덕(?)이라는 다소 극단적 시각도 숨기지 않는다. 중국이 문혁과 같은 사건과 사회 모순을 반복적으로 교정하는 과정에서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동력과 지혜를 확보했다는 논리다. 물론 그는 자신이 경험한 홍위병들의 만행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오가 이 비극을 유도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다만 역사적 사건은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그 근저에서 분석해야 또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지혜가 보인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가의 독창적 분석은 그가 창안한 ‘심근(心根)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학이란 모름지기 전통 문화의 토대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문학론이다. 추상보다는 인간 개인의 현장에서 출발해 분석하고 사회와 역사를 전통적 시각에서 거시적으로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초들의 삶 속에서 문혁을 바라보면 문혁 평가의 편협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그는 외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만민평등에 숨은 함정들

작가는 문혁이 이 시대에 던지는 3가지 토론 의제를 전한다.

첫째,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다.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대의 민주 시스템이 100%의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거다. 검증된 엘리트마저 표를 통해 민중의 선택을 반드시 받으라는 보증이 없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아킬레스 건이다. 마오 권력의 포퓰리즘이 문혁의 주요 원인이라면 현대 민주주의 역시 (선거과정에서) 필연적 광기를 몰고 올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혁명이 공정성을 수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혁명이란 미명으로 저질러지는 광적 살기를 어떻게 합리화 할 수 있을까”라고 저자는 탄식한다. 혁명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만행을 경계하자는 얘기다.

셋째, 평등에 대한 의문이다. 문혁이 앞세운 ‘만민평등’이라는 갑옷을 입고 실패한 정신병자(광적 홍위병)들이 총칼을 휘둘렀고, 그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참혹한 문혁을 통해 현재의 ‘평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형규 중국전문기자 chhk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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