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총서기 조자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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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새로 당총서기서리로 임명된 조자양수상(68)은 농업전문가로서 성장, 등소평의 현대화계획을 실천하는 젊은 테크너크래트의 모델.
언제나 두툼한 안경 너머로 포근한 인상을 풍기는 조는 호요방보다는 정치적문제에 있어 덜 리버럴하며 주로 경제문제에 관심을 집중, 적이 별로 없다.
1919년 하남성 골현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2년에 공청단에 가입하고 38년2월 정식으로 중공당원이 됐다.
50년대에 광동성의 당간부로 토지개혁을 관장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인 67년 주자파로 몰려 수난을 당했다. 7l년 복권된 조는 내몽고자치구와 광동성 당제1서기로서 농업경제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75년에 사천성 당제1서기로 임명된 그는 개인경영을 다시 도입하고 기업에 자주관리권을 일부 부여하고 성과급제도를 도입하는등 참신한 경제개혁 실험으로 77∼80년 사이에 농업생산을 25%, 공업생산을 81%나 증대시키는 성과를 거두어 이를 인정받아 당중앙에 진출했다.
그러나 조는 정치적으로 기회주의적인 면모도 보여 76년 등소평이 두번째로 숙청됐을때 공개적으로 그를 비판했으며 문혁당시 4인방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76년에는 그들의 체포를 환영했다. 또 4인방 타도후 화국봉과 등소평이 첨예하게 대립되었을 때 처음에는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다 등쪽으로 기울게 됐다.
그러나 조가 지방의 세력기반을 업고 정치적 중립성과 경제적 전문성을 경비했다는 점이 처음부터 중앙의 공청단에서 성장, 등소평의 직계로 출세한 호요방보다 보수파의 지지까지 받을 수 있는 잇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80년 3월 부수상으로 당중앙에 진출한 조는 그해 9월에 수상, 81년 6월에 당부주석으로 부상했다.
당중앙에 진출한 이후 등의 개혁노선에 힘입어 사천성의 성과를 전국에 걸쳐 실험할 수 있게된 조는 수상취임후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여 서구통으로 알러져 있기도 하다.
재혼한 그에게는 4남1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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