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숫자 뒤에 감추어진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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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모병제로 군인을 모집하는 미국 해군이 몇 년 전에 '해군에 입대하면 뉴욕 시민으로 있을 때보다 사망률이 낮아진다'는 광고를 낸 일이 있다. 군대라면 전쟁이 연상되고 그 위험성 때문에 입대를 꺼리는 젊은이들에게 군인이 그렇게 위험한 직업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광고였을 것이다.

이 광고에서는 당시 뉴욕 시민의 사망률이 1천명당 16명인데 비해 해군의 사망률은 9명이라는 통계 숫자까지 제시하며 객관성을 보이려고 했다. 언뜻 들으면 상당히 설득력있게 들리는 이 광고는 사실 숫자놀음일 뿐이다.

뉴욕 시민의 사망률을 높이는 것은 노약자와 갓난아이들이다. 반면 해군에는 건강한 젊은이들만 있으니, 당연히 사망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해군 업무의 위험성을 제대로 따지려면 입대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나이와 건강 상태를 가진 집단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 입맛대로 가공하는 정치인.학자

이처럼 통계 숫자는 일견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잘 해석하지 않으면 왜곡된 정보를 주기 일쑤다. 문제는 이러한 속성을 이용해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두 달 전쯤 노사관계가 불안하다는 지적에 대해 청와대에서는 노동부 통계를 근거로 "노사분규 발생이나 분규 참가자, 근로 손실일 등이 지난해의 2 ~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올해의 노사분규가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의 통계로는 노사분규 건수나 참가 근로자 수가 지난해의 경우를 훌쩍 넘어섰다고 한다. 이처럼 월별로 기복이 많은 통계는 기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결론이 1백80도 바뀔 수 있으므로 객관적인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애초부터 부적절한 것이었다.

입맛에 맞게 통계를 자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객관성을 중시해야 하는 학자의 경우에도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응용분야와 기초분야의 비중을 어떻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는데, 응용분야 교수들은 공과대학의 규모가 큰 일본 도쿄(東京)대의 예를 들며 응용분야를 지금보다 더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게 마련이고, 기초분야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응용분야가 약한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대의 예를 들면서 일류 대학이 되려면 기초 분야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물론 도쿄대나 하버드대 모두 세계 일류 대학인 점에서 우리가 참고로 삼을 만한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나름대로의 철학을 정립하지 못하고 자기가 속한 소집단에 유리한 통계만 가져다 객관적인 데이터라고 우겨서는 결코 이들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숫자는 나타내는 바가 명쾌하고 사람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장점이 있다. 최근 참여정부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란 어젠다를 앞에 내세우는 것은 그런 면에서 이해할 만하다.

처음 출범할 때 내놓았던 '동북아 경제중심 건설'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발전'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같은 국정과제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일반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는 구호이기 때문이다.

*** 대선자금 짜맞추기 경계해야

하지만 이러한 숫자적 구호가 생동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뒷받침돼야 한다. 아마도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하려면 역시 '동북아 경제중심 건설'과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같은 과제를 실현하는 일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일 것이다. 결국 구호를 바꾼다고 해 우리의 과제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기에, 숫자 뒤에 가려진 복잡한 실상을 터놓고 토의하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최근 여야의 대선자금 공개 때문에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여당은 적당히 짜맞춘 '죽은 숫자'를 내세우며 모든 것을 공개했다고 하고, 야당은 그마저도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을 때 국민이 가장 많은 기대를 보였던 분야가 정치개혁이었다. 대선자금 공개가 진실로 확인된 '살아있는' 숫자의 경쟁이 될 때, 진정한 정치 개혁이 시작됐음에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숫자를 보고도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의심해야 하는 후진적 상황을 우리는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까.

吳世正 (서울대 교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