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도 빙긋 웃는 ‘욕쟁이 이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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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호 28면

오늘의 주인공은 경리단길 골목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 여 사장님이다. 이 분을 부르는 호칭은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두 ‘이모’다. 내가 이모님을 처음 만난 건 4년 전. ‘우리 슈퍼’라는 정겨운 이름의 슈퍼마켓 앞에 힙한 수입 맥주 홍보물이 잔뜩 붙어있는 풍경 때문이었다. 10평 남짓한 가게 안은 흔한 슈퍼 물품들로 가득했는데, 냉장고를 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온갖 수입 맥주들이 가득가득. 동네 슈퍼에서 이런 맥주들을 팔다니!


더 놀라운 풍경은 그 다음부터였다. 한 남자 손님이 들어와 “이모!”하고 부르니 여 사장님의 무심한 듯 시크한 한 마디. “어! 써글놈.” 잠시 후 외국인이 가게로 들어와 어설픈 한국말로 “이모, 오랜만이에요” 인사하니 또 돌아온 대답은 “이런 씨부랄X, 왜 이제 오고 지랄이야”였다. 이 묘한 정겨움의 정체는 뭐지?

이후 나 역시 이곳을 찾을 때마다 자연스레 이모님의 욕을 들어야 했다. “이모, 저 술 끊어야 하는데 먹고 싶은 맥주가 너무 많아요.” “그럼 그냥 먹어. 내일 뒈져버리면 못 먹잖여.” “이모, 요즘 잘나가는 술 좀 골라주세요.” “XX, 내가 그걸 워케 알어? 그냥 대충 골라.” 나뿐만 아니라 어떤 손님과도 이모님은 이런 식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얼굴 붉히는 사람이 없다. 한국어를 좀 아는 외국인들도 이모님이 욕을 하면 빙그레 웃는다.


사실 이모의 전매특허인 욕이 아니어도 이 집은 맥주 매니어들 사이에서 너무 유명하다. 겉모습은 일반 슈퍼마켓과 다를 바 없지만 국내 유명 대형 마트보다 더 많은 수입맥주(약 230여 종)를 보유하고 있다. 가격도 마트보다 저렴해서 맥주 애호가들의 성지로 꼽힌다. 가격도 2000원~5만원대까지 다양하다.


냉장고에서 취향대로 골라 계산한 후 가게 옆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게 일반적인 코스. 나름 음악도 틀어준다. 그때그때 바뀌는 곡 선정 기준을 물었더니 이모님 왈. “기분 내키는 대로 트는 거야.” 단, 깊은 밤에는 주로 조용한 음악을 튼다. “밤이 깊었으니까 빨리 꺼지란 뜻이지. 푸하핫.”


이모님의 욕에는 ‘찰진’ 기술이 있다. 상대방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것. 관찰력 반, 직감 반으로 각각의 손님에게 어울리는(?) 욕을 한다. 매일 오는 한국인 취객은 ‘젖은 놈’, 술집에 너무 멀쩡한 정신으로 들어오는 손님은 ‘빠짝 마른 놈’,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오는 단골 외국인은 ‘뺀질이’ 등등.


밤늦도록 맥주판이 벌어지면 ‘진상’ 취객이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이모님의 엄격한 컨트롤 덕분에 항상 질서정연한 것도 이 집만의 특징이다.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손님이 있으면 이모님은 노란색 싸개를 씌운 맥주병을 ‘옐로카드’처럼 내민다. 순간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손님은 머쓱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게 되고, 다른 손님들도 한바탕 웃으며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간다. 이모님은 “가게 앞이 늘 이렇게 붐비면 불편할 텐데, 그래도 이웃 주민들이 가족처럼 배려해줘서 지금까지 이 집을 운영할 수 있었다”며 “언젠가 이곳을 떠나게 되는 날에는 정말 큰 선물을 하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육두문자 없는 이모님의 조용한 말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마을 주민께는 죄송하지만 제발 그런 날은 오지 않기를.


참, 이곳 지하에는 수제맥주 전문점이자 피자 맛집으로 유명한 ‘맥파이’가 있다. 대표 메뉴는 페퍼로니 피자와 치즈 피자. 맥파이에서 피자를 사서 우리 슈퍼에서 맥주와 함께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


이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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