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뿌리 한국문화(6)대마도서 순직한 신라충신 박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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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복강(후쿠오카) 공항에서 장난감 같은 쌍발프로펠러 비행기를타고 북서폭으로 20여분쯤 달리면 대마공항. 거기서 택시를 타고 이 섬의 중심도시 엄원(이즈하라) 정까지 가는동안 길가의 집들 뜨락에는 수국꽃이 한창이었다. 도내를 일주하는 동안 농어촌 지붕에는 박덩굴이 덮여있고 헛간에는 디딜방아가 놓여있는데 뒤뜰 감나무에는 뭇까마귀가 시끄럽게 지저귀는 풍경이 흡사 우리나라 농촌을 보는듯한 인상이다.
대마도는 오늘날 한적한 섬에 지나지 않지만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대륙과 왜를잇는 다리였다. 마치 현대의 국제공항과 같아 각국 인종이 붐비고 포구엔 많은 물자가 흥청거렸다. 우리나라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왕래가 빈번했던만큼 섬 전체에 우리의 문화유산의 잔재가 한데 옹기종기 남아 있어서 문화자료관 같은 느낌을 준다. 대마도는 바로 우리 고대사에 샛별처럼 빛나는 애국충신 박제상이 순국한 곳이다.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왕자를 구출키 위해 갖은 애를 쓰던 끝에 왕자는 무사히 귀국시켰지만 자신은 끝까지 충절을 굽히지 않아 왜인의 손에 화형을 당한 곳이다. 필자는 박제상의 혼백이 방황하고 있을 이 섬에서 무언가 그의 흔적을 찾아 보려고 여러곳을 찾아다녔다. 워낙 옛날 이야기라 문헌 기록이나 민화를 찾을수는 없었지만 한일양국의 사서를 비교해 봄으로써 처형장소등의 윤곽만은 실지 조사에서 추정할수 있었다.
신라 제17대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이 인질이 되어 왜로 간 시기에 대하여 한일 두나라 사서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삼국사기』엔 402년,『삼국유사』엔 309년,『일본서기』엔 200년으로 나타나 있다. 그중에도『일본서기』의 연대는 특이하다. 해방후 일본사학계에선 『일본서기』가 사실보다 어긋난 대목이 많고 연대도 상고사관계는 2백년이나 끌어올려 그들의 천황탄생이 매우 오래됐음을 보이기위해 날조했음이 판명된바 있다.
따라서 박제상관련 연대도 2백년을 가산해서 400년으로 보아야 할것이다.『일본서기』편찬자들은 연대는 물론, 사실도 과감한 서술이 적지않음이 분명하나 등장인물 처형경위 처형장소등의 기사는 어느 정도 믿어도 좋을 것 같아 우리측 사서의 부족함을 보충, 사화의 진실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점도 있다.
우선 박제상 사화에 등장한 인물과 그들의 실명을 보면, 우리측 사서에는 박 (또는 김) 제상(또는 모말)이 중심인물인데,『일본서기』엔 그 이르이「모마리질지」로 나온다. 왕자도 우리측엔 미사흔(『삼국사기』)「미해」(또는 미토희『삼국유사』)로 기록된데 대해『일본주기』엔「미질기지파진간기」로 기록되어있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으로『일본서기』엔 박제상과 왕자외에 우리 사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두사람이 더 보인다.
바로 한례사벌과 부나모지다. 이중 한례사벌이란 인물은「사벌」이란 표기가 신라의 최고 관등인 사벌(서발=서발한=각간)을 나타내고 있는데 비해 박제상(모마리질지) 부나모지의 두사람은 다만「지」(디)만을 붙였으니 한례사벌이 외교사절단의 대표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일본서기』의 기사도 그렇게 다루고 있다.
『일본서기』기사를 참조하면 박제상의 실명은「모(도) 디」요, 왕자는「미디기디바 한기믿짓바 찬」이 되며 우리측 사서의「미해 미토희」등 당시발음과 일치한다. 미사흔이 왜국으로 갈 때 부사로 따라간 박사람은『일본서기』엔 나타나지 않으며, 이때 일본측 대표자는 갈성습진언이다.
박제상이 처형당하게된 경위를보면 먼저 우리측의『삼국사기』엔 제상이 신라를 출발할때 계책을 세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제상은 왕(눌기왕) 에게『신이 떠난뒤에, 신이 나라를 배반한양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이르고 떠나 왜에 이르러 왜왕에게『신라왕이 미사흔과 나의 가족을 감금했다』고 하니 당시 소문이 또한 그러한지라 왜왕이 제상의 말을 믿게 됐다고 되어있다. 한편『일본서기』에는 미사흔이 자기를 데리러온 세사람의 말을 왜왕에게 고하기를『우리왕이 내가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아 나의 처자를 몰수해서 노비를 삼았다고 한다』라고 하니 왜왕은 이들 세사람의 사자가 한 말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대마로 미사흔과 사자 세사람, 그리고 왜장인 습진층등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물왕과 눌지왕은 관계가 안좋은 것으로 돼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박제상일행이 미사흔을 본국으로 도환시킨 장소를『삼국사기』엔 「해중산도」라고만 한것을『일본서기』에선『함께 대마에 이르러 서해의 수문에 이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마의「서해수문」(사히노우미·미나도)에 대하여, 일인학자는 일본 서쪽 바다에 있는 은기도방언에 상어 (교·사메) 를「와니」(악어·악) 라 하니 서해의 서해는 대마의 북단에 있는 악포(와니우라)라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현지에서 조사한바로 악포는 지형조건상 한일 두나라의 외교관들이 머물러 신라의 정보를 탐지할만한 곳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대마도안에는 왜정부의 출장소가 있었다. 대륙과의 왕래의 거점이 되었고 또 도의 경제및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이곳이 바로 대마의 미진도 (미쓰시마)정에 있는「선월」(후나고시)이란 곳이다. 이곳은 옛날 유당사나 견신라사들이 지나다니기도 했다.
이곳은 대마도 중앙부에 깊숙이 들어간 곳이다. 왜가 대륙과 왕래할때는 배로 동쪽의 선월포까지 와서 하선, 언덕을 넘어 서쪽의 서조출(니시구마데) 에서 배를 갈아탄다. 서조출의 북녘언덕을 홍법단이라 부르는데 일본의 고승인 공해 (9세기께 승려) 가 당에서 돌아올때 이곳에 머물러 보광사를 세웠다.
또 흠명천황 당시 백제로부터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도 백제사신이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왜로 건너갔는데 머무르는 동안 당을 세워 불상을 안치했고, 그뒤 거기다가 매림사를 세워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강호 (에도)시대(17∼19세기)한국을 왕래하는 선박들은 모두 대마도주인 종씨의 문인(도항증명서)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것을 발행하는 사무는 또한 이곳에서 행해졌다.
박제상은 이섬의 짙은 아침안개를 이용해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켰다. 탈출수단과 방법에대한 한일 양국의 사서기록은 거의 일치한다.『삼국사기』엔 아침 일찍 일본 관헌이 와서 왕자의 안부를 묻자 제상은 아직 안 일어났다며『배를 타서 피로하다』,『삼국유사』엔『어제 고기를 잡노라 피곤해서 아직 못 일어났다』,『일본서기』도『갑자기 병이 들어 곧 죽게됐다』는 등의 기사가 보인다.
박제상의 처형방법에 관해서『삼국사기』는『사람을 시켜 섶으로 사지를 불태운 뒤에 칼로 베었다』,『삼국유사』는『불태워 죽였다』,『일본서기』는『우리에 넣어 불태워 죽였다』로 되어 있다.
처형장소에 관해선『일본서기』는 언급이 없고,『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목도」라 하였다.『일본서기』에 처형장소에 관한 아무런 기사가 없는 것은「선월」의 서조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그렇다면 서조출에서 가까운 무인도가 아니었던가 여겨진다.「목도」란 지명의 섬은 현재의 지도에서는 물론, 엄원정에 있는 장기현립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있는 강호시대 지도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기도」(기시마) 란 작은 섬이 선월근방에 있다.「목」은 일어로「기」이니, 어쩌면「기=목=기」가 아닐지.
그러나 이는 다만 추측일 뿐이다. 필자는 박제상 일행과 왜측 사절단이 머무른 곳은 바로 선월일 것이라는 확신은 가졌지만 박제상이 천추의 한을 머금고 이국섬에서 순절한 장소를 밝혀내지 못하니 여간 통분스럽지 않았다. 선월에 이르렀을 때, 마침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앞바다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운무에가려 오락가락 하였다.
지금도 박제상을 비롯한 세사신의 높은 넋이 그속을 헤매는 듯 하여 가슴이 메이는것 같았다. 동국대 일본구주지방 학술기행 김사엽<동국대 일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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