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민주화바람 동남아 특별순회 취재<6> 인도네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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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자카르타=이규진 특파원】
『바다로 들어간 마스토돈들은 모든 물고기를 집어삼키고 시멘트와 합판을 게걸스럽게 입에 넣고 전신주와 수입영화를 꾸역꾸역 삼키고 원유와 향료, 코피와 마늘을 걸신 들린듯 먹어치울 것이다』
작년 12월9일밤.
자카르타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저항시인 「렌드라」의 시낭송회에 참석했던 수천명의 청중들은 단상에서 울려나오는 「뜨거운 언어」에 열광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양심」으로 불리는 반체제시인 「윌리보르두스·S·렌드라」(51). 그는 7년만에 당국의 규제에서 해금, 다시 무대에 서서 세태를 꼬집는 뜨거운 언어들을 거침없이 내뿜었다.
그가 발표한 작품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수하르토」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이며 대기업가인 중국계인도네시아인 임초량등 대부호들을 풍자한 『마스토돈을 증언한다』 였다 (마스토돈은 제3빙하기때 생존했던 코가 긴 동물. 시에서는 권력과 영향력이 막강한 인간으로 비유됨) .
인도네시아 경제계에서 「임보탁」(대머리라는 뜻) 으로 통하는 임초량은 지난40년간 정
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아 제분·시멘트·금융·무역업등에 진출, 인도네시아 제1의 부호가 됐다.
「렌드라」가 풍자한 마스토돈들의 횡포는 이미 자카르타 지식인층에는 널리 알려진비밀. 그러나 누구도 공개석상에서 대놓고 말을 꺼내지 않는다.
「렌드라」의 시낭송회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자카르타시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입장권이 삽시간에 동나고 암표가 입장요금의 3배가 넘는 1만루피아(약9천원)에 거래될 정도였다.
이 시낭송회에 참석했다는 한 영자지기자는 『지난 수년동안 보지 못했던 민주화에의 열기였다. 청중들은 말은 안했지만 모두들 「롄드라」 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풍자의 언어속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눈치였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바로 이러한 갈망은 자카르타 시민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언젠가는 밖으로 분출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이 기자의 진단이었다.
「지하드」 (성전) 라는 이름의 지하단체는 정부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폭탄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지난 5월 자카르타주재 미·소·가·일본대사관들이 폭탄세례를 받은 사건이나 작년 12월의 국영TV와 작년9월의 국영라디오방송국 폭발사고도 모두 이들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정부의 반체제탄압은 가혹하다. 대학생이 반정부시위를 벌이면 3족의 출세가 막히고 사회단체나 종교단체가 반정부활동에 가담하면 해산되기 십상이다.
언론기관과 노동조합이 어용화됐다는 비판도 드세다. 문화예술활동도 마찬가지다.「렌드라」도 78년8월 국가에 대한 증오심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투옥됐다가 국제적인 압력을 받아 같은해 10월 석방은 됐었으나 7년간일체의 창작발표활동이 금지됐다.
그러나 「렌드라」의 해금은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수하르토」정부가 국민들의 민주화열망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그의 입에 채웠던 재갈을 풀어줌으로써 민주화로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다.
지난2월 필리핀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 「마르코스」가 쫓겨 나갔을때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긴장한 나라가 바로 인도네시아였다.
혁명의 불똥이 민주화바람을 타고 인도네시아에 넘어와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인도네시아 반체제세력을 고무시키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지난5월 발생한 외국대사관 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났을때 바로 필리핀으로부터의 민주화바람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도 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최근 그의 네번째 임기가 끝나는 88년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시사한 적이 있으나 그가 쉽게 물러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직 뚜렷한 후계자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지난65년9월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음모를 분쇄하고 집권한 이래 파산상태의 국가경제를 재건했다. 또 그를 가리켜 복잡하고 방대한 인도네시아를 지난 20년동안 수완좋게 통치해온 유능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억압정치와 불공평한 부의 분배문제가 계속 거론되고 강요당했던 국민들의 침묵이 깨질때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열풍은 의외로 쉽게 불어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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