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규명된 것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소련전폭기에 의해 2백69명의 참사를 가져온 KAL기 격추사건 3주년을 맞았다. 그 동안 사고원인의 규명이나 가해 측에 의한 사과·배상 같은 절차는 하나도 진행된 것이 없다.
다만 미·일·소 등 강대국들 사이에 민항기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하트라인 설치 등 조치가 마련됐을 뿐이다.
지금까지 KAL기 사건에 대해 소련이 행한 것은 소련군용기에 의한KAL기 피격사건이 있었다는 사실확인과 그것은 KAL기가 소련영공을 침입, 첩보행위를 했기 때문이라는 책임회피뿐이다.
모든 사고의 처리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사고원인과 사고 경위의 규명이다.
사고원인은 블랙박스를 찾지 못해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돼있다. 미국과 소련함정들이 사건 직후 문제의 박스를 찾기 위해 수일간 수색작업을 벌이다 불가능 판정을 내린 뒤 중단됐다.
그후 잇단 보도들은 미국이 이 블랙박스를 찾아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미국은 이 미스터리에 대한 명백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
사고경위는 소련이 밝힐 책임이 있다. 소련 당국은 KAL기 격추가 자기네 소행임을 시인하고도 그 구체적인 경위와 내막을 밝히지 않고 있다.
미소 무 강국이 이런 문제들을 밝히는 노력을 회피한다면 민항기 비극의 재발방지에 대한 성의부족이란 비난을 면키 어렵다.
우리는 소련의 비인도적 만행과 철면피한 행위를 다시 규탄치 않을 수 없다.
KAL기가 비록 항로를 벗어나 소련영공에 들어갔다 해도 어떻게 비무장 민간여객기를 격추 할 수 있단 말인가.
만보를 양보해 KAL기가 첩보행위를 했다해도 그것이 당장 소련의 안위를 위협하는 도발이 아님이 명백한 이상 군사가 인도주의보다 앞설 수는 없다. 「첩보행위」운운도 무슨 증거가 있는가.
비록 전시라 해도 민간 목표물은 공격대상에서 제외하며 그것을 보호하도록 오늘의 국제전쟁 법규들은 규정하고 있다.
이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고도로 존중하는 근대 문명사회의 철칙이다.
그럼에도 세계의 지도적 국가인 소련이 민항기를 격추시키고도 아직 책임있는 조처를 않고 있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을 의심케 할뿐만 아니라 인류의 양심과도 거리가 먼 행위다.
우리는 거듭 소련정부에 요구한다. 경위야 어떻든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책임을 통감하여 사고의 경위를 명백히 해명하고 피해 국의 정부와 국민에 사과하는 한편,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보상하고 다시는 그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고 공약해야 한다.
이것이 이행되지 않는 한 소련은 인도주의와 국제법 정신에 의한 지속적인 국제적 응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소련은 아시아·태평양으로의 관심을 높이고 여기에 정책의 비중을 증대시키고있다.
소련은 또 88년 올림픽 참가를 위해 서울에 와야할 입장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소련은 먼저 KAL기에 대한 책임을 명쾌하게 청산해야 한다.
세계가 「지구촌」이래 갈수록 공중의 안전은 더욱 절실해진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키 위해서도 소련의 책임회피는 결코 묵과돼서는 안될 문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