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필리핀 아키노 여부에 주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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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아시아 지역엔 확실히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철옹성 같던 필리핀의 「마르코스」 20년 독재가 민중의 힘에 의해 무너지고 그 파장은 동남 아시아를 거쳐 멀리 파키스탄까지 일렁이고 있다.
경제성장에서 아시아의 모범생으로 지목받던 싱가포르가 작년을 고비로 경제적 딜레마에 빠지고 인도네시아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화 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
스리랑카 역시 고질적인 인종 분쟁이 다시 터지면서 새로운 변화의 거센 물결을 받아들일 조짐이다.
중앙일보는 이 자유의 바람의 풍향과 풍속을 알아보기 위해 외신부 이규진 기자를 현지에 특파, 생생한 현지 소식을 시리즈로 연재한다. 【마닐라=이규진 특파원】
『우리 앞에는 장기 독재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밝은 희망의 무지개가 피어 올랐습니다.용기의 노란색과 믿음의 잿빛, 그리고 의무의 초록색 아래 과거의 갈등을 묻어버리고 국가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다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지난 3월 26일 필리핀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이렇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며 민주화 작업을 다지고 있는 「코라손·아키노」대통령은 필리핀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와 기대, 그리고 주시속에 민주화 작업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마닐라시 외곽 한적한 컨스티튜션 힐에 위치한 필리핀 국회의사당 바타상팜반사에서는 요즘 연일 밤을 밝히면서까지 신헌법 제정 작업이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아키노」 대통령에 의해 지난 5월 임명된 48명의 헌법 위원회 위원들은 그 동안 사회 각계 각층의 여론을 수집한 후 3개월 시한이 끝나는 8월말까지 신헌법 초안을 만들어 내놓을 계획이다.
지난 7월에는 국회 구성을 양원제로 하기로 결정했고 92년 선거부터는 대통령 임기를 6년 단임제로, 부통령과 상원의원들은 6년 임기의 중임제로 하기로 결정했다.
또 옴부즈맨(호민궁) 제도를 채택,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키로 했으며 모든 공무원의 청렴결백과 성실한 봉사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헌법 조항에 넣기로 결정했다.
필리핀 민주화의 핵심인 신헌법 제정 작업이 이같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과 함께 「아키노」대통령 정부의 앞날에 서광을 비춰주는 중요한 행사가 7월 27일 전국적으로 거행됐다.
바로 필리핀 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필리핀 군부의「아키노」 정부에 대한 충성서약이 그것.
지난 2월 혁명과 7월 6일 마닐라 호텔에서 벌어진 반혁명 사건을 통해 필리핀의 강자로 부각된 「환·폰세·엔릴레」국방상을 비롯, 「피델·라모스」필리핀 군사령관, 그리고 지역 사령관등 모든 군부 지도자들이 같은 시간에 동시에 충성서약을 했다.
필리핀 군부는 「아키노」 대통령 정부 출범이래 필리핀내의 미군기지 문제, 마닐라 호텔의 반혁명 사건 처리문제, 필리핀 공산당(CPP)과의 협상에서 군부가 제외된 사실등 몇가지 이슈에서 「아키노」대통령 측근들과 의견 충돌을 빚어왔다.
특히 「아키노」 정부가 출범한 직후 「마르코스」 정부 치하에서의 인권탄압문제를 조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군부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르코스」대통령 당시 인권탄압에는 군부의 일부가 깊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부가 충성 서약을 했다해도 이런 불만이 쉽사리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마닐라 정치분석가들의 해석이지만 일단 군부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의구심을 씻는데 어느정도 기여했다.
군부의 이같은 유보적인 충성과 함께 「아키노」 대통령이 넘어야 될 또 하나의 장애물은 「아키노」 대통령 자신의 장래 문제다. 「아키노」 대통령은 지난 2월 대통령 선거 유세때 자신은 「마르코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83년 8윌 그녀의 남편 「베니그노·아키노」 전 상원의원 암살사건의 공정한 처리를 위해 대통령에 출마했다고 말했었다.
또 6월 초에는 헌법위원회에서 만든 신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내년 초 실시된다해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작업을 끝내고 「아키노」 대통령이 약속을 지켜 물러날 것이냐는 것도 문제다.
마닐라 정가에서는 「아키노」 대통령이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정직한 주부라는 점에서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전망과 국민의 지지가 계속되고 측근들의 강력한 요구가 계속되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라는 양설이 계속되고 있다.
만약 신헌법에 내년 대통령 선거의 규정이 포함되고 「아키노」 대통령이 출마하게 되거나, 신헌법에 내년 대통령 선거의 언급이 없이 현체제대로 6년을 더 가도록 내버려둔다면 「아키노」 대통령은 큰 시련을 겪어야할 것 같다.
전자의 경우는 「아키노」 대통령 자신 스스로가 국민에게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되고 후자의 경우는 이미 대통령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힌 「살바도르·라우렐」 부통령을 정점으로 한 민주연합세력(UNIDO), 그리고 「마르코스」 지지자들로 구성된 국민당(NP)등의 거센 반발에 부닥칠 것이 분명하다.
「아키노」 대통령이 넘어야될 또 하나의 큰 문제는 미군기지의 장래에 관한 것이다.
「아키노」 대통령 정부는 사용기한이 만료되는 91년까지는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겠지만 그 이후는 필리핀의 선택에 따라 그때 가서 결정하겠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군부와 경제계에서는 91년 이후에 가서도 미군기지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필리핀 국익에 도움이 된다며 「아키노」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경제계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쏟고있는 것은 만약 필리핀 정부가 미국에 91년 이후의 미군기지 사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외국투자가들이 필리핀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껴 필리핀을 기피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아키노」 대통령이 8월 중순 미국을 방문하게 되면 이 문제가 큰 이슈로 대두될 것은 틀림없고 그 결과에 따라 필리핀 정국에 미치는 파장은 「아키노」 대통령 정부의 앞날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키노」 대통령이 시급히 해결해야 될 문제는 필리핀 공산당과의 화해문제다.
「아키노」 대통령은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산주의자들과 「국민의 대화합」 이라는 대전제 아래 대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공산당의 미온적 태도로 아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필리핀 전국 곳곳에서 신인민군(NPA)의 공격이 활발히 전개되고 필리핀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있는 현 상황은 「아키노」정부의 민주화 작업에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이런 어려움은 있지만 국민들은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다. 이미 독재의 상징이었던 「마르코스」를 몰아냈고 「민주화 일정」이 진행중이라는 기정 사실 때문인지 마닐라 거리는 활기가 넘쳐있다.
마닐라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상업중심지인 마카터가와 붐비는 인파속에서 만난 조그만 무역회사의 매니저로 일한다는 「환·레오나르도」씨(48)는 『2월 혁명 이후 마닐라 시민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 갈습니다. 피 안흘리고 20년 독재를 무너뜨린데 대해 우리 필리핀 사람들은 긍지를 느낍니다』고 말했다.
「레오나르도」씨는 스스로를 「마르코스」 지지자였다고 소개하면서도 「아키노」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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