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업 후광효과 뺀 자체신용도 공개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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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업·계열사의 지원 가능성을 배제한 기업의 자체신용도(독자신용등급)가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공개된다. 대기업 계열사라는 이유만으로 신용등급이 부풀려져서 투자자가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금융위원회는 21일 이러한 내용의 신용평가시장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개별 기업의 독자적 채무상환능력을 보여주는 자체신용도는 내년에 민간금융회사에 대해 우선 도입된다.

2018년부터는 일반기업까지 전면 실시한다. 단, 공기업은 정부 지원이 법적으로 보장된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했다. 유사 시 모기업이 지원을 중단하는 ‘꼬리 자르기’ 우려가 있는 민간기업에 한해 도입한다는 취지다.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같은 글로벌 신평사는 이미 자체신용도를 공개하고 있다.

자체신용도는 금융위가 2012년 3월부터 도입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신용등급이 강등될 것을 우려한 기업들이 반발하면서 실행이 미뤄졌다. 이후 신평사가 A등급을 줬지만 모회사(KT)의 지원 중단으로 법정관리에 갔던 KT ENS(현 KT이엔지코어) 사태(2014년)로 투자자의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S&P는 “KT ENS의 자체신용도는 B등급 수준이었다”는 분석을 내놨다. 김태현 금융위 자본시장국장은 “그동안 시장상황 등을 고려해 자체신용도 도입을 연기했지만 이번엔 발표대로 추진한다”면서 “금융회사가 시행하는 걸 보면 일반기업도 이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 보고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자체신용도를 등급 형식으로 표기하진 않기로 했다. 예컨대 특정 기업의 자체신용도는 B-등급, 최종등급은 BBB-등급에 해당된다면 신용평가서엔 “모기업의 지원 가능성을 고려해 6노치(notch·급수) 상향조정해 BBB-등급”이라고만 기술한다. 투자자는 이를 보고 계산해야만 자체신용도가 B-등급임을 알 수 있다. 기업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종의 절충안이다.

자체신용도 도입으로 인한 유불리는 대기업집단의 계열사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다. 700여 개 코스피 상장기업의 모임인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는 “회원사 간에도 ‘아빠가 잘 산다는 이유로 등급을 높게 주는 건 문제 있다’는 쪽과 ‘아빠가 잘 사는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갈려서 합의된 의견은 없다”고 전했다. 그는 “그동안 신용등급 두 개가 동시에 나오면 시장에 혼란이 있을 거란 우려가 많았는데 금융위가 제시한 표기방안대로 하면 그런 혼란은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용평가사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도 마련된다. 지금은 기업이 평가를 의뢰하고 비용도 지급하기 때문에 신평사가 소신껏 평가하기 어렵고 등급 인플레, 뒷북평가 문제가 발생했다. 앞으로는 기업이 아닌 제3자(투자자·구독자 등)의 요청에 따라서도 신평사가 신용등급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또 내년 하반기부터는 기업이 원한다면 금감원 같은 제3의 공적기관에 신평사를 선정해달라고 신청하는 제도가 도입된다. 이 제도를 이용하는 기업엔 반드시 2곳 이상에서 등급을 받아야 하는 복수평가 의무를 면제하고 1개 등급만으로도 회사채 발행을 허용해준다.

업계의 관심사였던 제4 신용평가사 허용은 보류됐다. 신규사 진입 시 영업경쟁 과열로 인한 부실평가, 등급쇼핑 같은 부작용 발생을 우려해서다. 김태현 국장은 “향후 시장평가위원회를 구성해서 신규진입 허용 여부를 주기적으로 검토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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