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향·무취·무색의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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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29면

어느새 가을이다. 찬바람은 마음을 맑게 한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오행 중 금(金)에 해당한다고 한다.


‘명경지수’라는 말도 있다. 맑고 깨끗하며 그 빛깔조차 영롱한 물이다. 깊은 산속 돌 틈을 솟아나온 석간수처럼 투명한 것이 바로 ‘명경지수’ 가을 물이다. 자연이 그러하니 사람의 마음 또한 그렇게 맑아지고, 향기나는 차 한잔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고요해진다는 뜻이다.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책 한 권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이럴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그 책을 서점에 부탁해 구입한 뒤 조금 읽어봤다. 93세의 노학자가 담담하게 쓴 아름답고 영롱한 거울 같은 수필집이었다. 아마 그 지인이 책을 구매해 달라고 한 것은 “너도 이 정도는 사유하고 좀 살아라”고 하는 간접적인 주문이었을 게다.


세상에 살면서 가장 미련스러운 짓은 어떤 일과 현상을 보고 남의 기준을 따라다니면서 함께하는 경거망동이었다. 세상에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내 잘못을 먼저 반성하고 남의 잘못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성이다.


지난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남쪽으로 향하는 시간이 느린 무궁화열차를 타고 평소 통화를 몇 차례 나눈 지인을 만나러 갔다. 가방도 없이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열차에 올라 차분하게 레일의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 갔다.


나에게 이런 정서가 있다는 것에 대해 세상에 먼저 감사하고 또 내 주변에 감사할 뿐이다.


내용에는 이런 글줄이 있었다.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 남녀가 서로 사랑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성스러운 인간적 의무이다. 완전한 삶을 위한 필수적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루어진 결혼이 이혼이 되기도 하며 가정적 불화를 초래하게 되는가. 사랑하고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결혼을 하기 때문이다. 무자격자의 가장 큰 특징은 이기적 인생관과 가치관이다. 이기주의자는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받도록 되어 있다. 이기주의자들이 세력을 갖거나 사회를 움직이게 되면 그 결과는 인간적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기주의란 무엇인가. 혼자 차창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장 쉬운 말이면서도 가장 행동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이기주의다. 내 생각이 옳다고 마음먹는 것이 첫째 이기주의고,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 작은 것이 둘째 이기주의며, ‘당신 먼저 하세요’하는 배려심이 부족한 것이 그 다음 이기주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은 무향·무취·무색의 물이라고 한다. 아내는 그런 물을 건강식품보다 더 좋아한다. 이 가을에 나부터 내려놓고 사는 무향·무취·무색의 마음으로 나는 수행을 하고 싶다.


정은광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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