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 수교 백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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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이양선 3척이 남양만을 거쳐 서울 양화진에 나타난 것은 1866년(고종 3년) 8월 중순께였다. 일찌기 이렇게 큰 괴물을 본 적이 없는 서울 도성이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 전함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나타난 지 불과 한 달 뒤의 일이다.
이 이양선은 중국 천진에 주둔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이 이끈 함선이었다. 이들은 『우리는 불낭국인(프랑스인)인데 귀국의 산천을 구경하러 왔다』고 했다. 양화진 포대에서 위협 발사를 하자 이들은 몇 발의 포탄으로 응사했다. 한강을 수비하던 조선 측의 소선 2척을 파괴한 다음 이들은 수로를 측정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로즈」제독은 10월에 7척의 전함을 몰고 강화도 앞 바다에 나타나 교전 끝에 강화부를 점령했다. 조선군의 응전도 만만치 않았다. 전국의 명 포수 5백여명이 동원되어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른바 병인양요다.
우리 나라 개항의 역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한국·프랑스 두 나라의 공식접촉도 이처럼「싸움」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두 나라의 첫 접촉은 그보다 82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784년 동지사행의 일원으로 북경에 갔던 이승훈이 프랑스 예수회 소속의 「그라몽」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은 것이다. 이 땅에 천주교의 수난사가 싹튼 순간이었다. 그후 많은 신부들이 겨울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숨어 들어왔다.
기독교는 물론 서양 학문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알고 있던 조선 조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1791년 신해박해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천주교 탄압이 빚어졌다.
병인양요는 그래서 일어난 한·불간의 무력충돌이었다. 양화진은 이런 인연으로 천주교도의 처형장이 돼버렸다.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영국, 독일과도 조약을 맺게된다. 종교 문제로 수교가 늦어졌던 프랑스는 서둘러 1886년 「코고르당」을 전권위원으로 파견, 13관으로 된 한불수호조약을 맺는다. 바로 6월 4일, 꼭 1백년전이다.
이 조약 가운데 특히 9관 2항에 「교회」라는 두 글자 삽입에 시간이 걸렸다. 포교의 자유를 의미하는 말이다. 프랑스가 통상보다 선교, 문화사업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기록이다.
그러한 전통이 「달레」의 『한국 교회사』(1874년), 한국 선교회의 『한불자전』(1880년), 「모리스·쿠랑」의 『한국서지』(1890년)를 낳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렵게 맺은 수교, 그 1백년을 맞으면서 한·불 두 나라의 유대가 앞으로도 더욱 굳어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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