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서의 민주화|최상룡 <고려대 교수·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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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일수록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의 역사에 대한 감각은 과연 신뢰할만한 것인가.
우리가 보통 역사의 교훈을 얘기할 때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유사한 현상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으며 현재의 시각에서 잘못된 것은 피하고 잘된 점은 이를 미래에까지 계승해야 한다는 역사 의식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후 40년에 걸친 나라 안팎의 정치 과정을 보면 우리는 우리 역사의 교훈과 세계사의 흐름에 도저히 등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첫째, 우리 자신의 현대사에서 얻은 경험부터 얘기해보자. 해방 후 한국 정치사에서 우리가 배운 쓰라린 교훈의 하나는 부정하게 권력을 잡아서도 안되며 부당하게 권력을 연장해서도 안 된다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너무나 실현하기 어려웠던 명제다. 부정과 부당을 얘기하면서 굳이 불법이란 말을 쓰지 않은 것은 부정과 부당한 권력의 당사자가 거의 예외 없이「합법」을 말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위기, 다시 말하면 정치 현실과 인간 내면의 분열이 극심한 때일수록 통치자는 다스리는 방법으로 각종의 법을 양산해 왔다. 로마 말기는 그 고전적인 예이며 지난날 우리의 역사에서도 경험한 바 있다. 아무리 신통한 궤변과 변명을 가지고도 이 정권을 멸망케 한 3·15 부정 선거를 합리화 할 수 없을 것이고, 박 정권의 업적을 예찬하는 사람까지도 10월 유신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현대 정치사에서 부당한 권력 연장 행위로서의 이 두 사건은 어쩌면 두 사람의 종말만큼이나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제5공화국이 장기 집권의 부당성을 헌법으로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일회적인 수습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정면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할 지상 과제로 되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민주화」나 「민주주의의 토착화」처럼, 이름은 달라도 여야 정치 세력이 다같이 보편적 가치로 인정하고 있는 터이다.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회 혁명 세력이 말하는 인민 민주주의가 아님은 물론, 프랑스 혁명기의 부르좌 민주주의의 단순한 재현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혁명을 막기 위한 안전판으로서의 민주주의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 체제는 정당간의 공정한 경쟁에 의해 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 체제로서 우리 현실에 맞는 제3의 정치 이념을 갖지 못한 현 시점에서 우리가 세계를 향하여, 북한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국민 앞에 떳떳이 내놓을 수 있는 최 량의 정치적 가치요, 일정 기간 실험하여 반드시 뿌리를 내려야 할 제도다.
이와 관련하여 둘째,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것은 오늘날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역하기 힘든 하나의 역사적 흐름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베트남이나 이란과 같은 악몽을 피해야 하며, 지중해 연안·중남미 등의 지역에서 최근 수년동안 나타나고 있는 민주화의 「도미노」 현상에 대해서 결코 둔감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민주화의 추세를 연대순으로 보면 1974년에 그리스, 74∼75년에 포르투갈, 76∼77년에 스페인 등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서 그리고 중남미에서는 80년에 페루, 82년에 볼리비아, 83년에 아르헨티나, 84년에 배네쉘라·엘살바도르·파나마, 85년에 니카라과·우루과이·브라질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탈 권위주의·민주화의 과정을 정치·경제적으로 유효 적절하게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허시만」 (A.O.H-irschman) 같은 사람은 특히 중남미의 민주화 과정을 경제 성장과의 관련에서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인간은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면 그에 상응한 자유를 구하게 마련이며 권위주의 정책을 통하여 일정한 수준의 경제 성장에 도달하게 되면 경제적 자유화와 함께 정치적 민주화로의 움직임이 싹튼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에로의 이행은 일률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한번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또 다시 권위주의에로의 역행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2천 달러 내지 4천 달러의 1인당 국민 소득이 반드시 민주화의 조건이나 지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 나라의 1인당 국민 소득의 3분의 l 밖에 되지 않은 필리핀의 이번 사태는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입장에 따라 필리핀을 보는 시각이 달라서 우리와의 차이를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절박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 모두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필리핀 사태가 미국인에게 그들의 진정한 국가 이익이 무엇인가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다는 점과, 군부가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면 민주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민주화의 문제는 너와 내가 아닌 우리의 문제이며 여나 야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진지하게 동참해야 할 역사적 과제다.
민주화의 길은 한 성직자의 표현처럼 『하느님과 화해하는 길』일 수도 있고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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