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大명물 '번개 철가방'… 두 얼굴의 '짬뽕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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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90년대 후반 고려대 안암캠퍼스에 다닌 학생들에겐 잊을 수 없는 명물로, 수많은 기업체 영업사원들에게는 마케팅 실전 명강사로 기억돼온 '번개 배달 조태훈'씨가 9년여 동안 남의 이름을 빌려 이중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 서부경찰서는 지난 18일 공무원을 상대로 대민서비스 강의를 하러 경기도 안성시청으로 가던 金모(38.서울 화곡동.사진)씨를 체포, 남의 주민증을 위조해 사용한 혐의(공사문서 위조 등)로 20일 불구속 입건했다.

金씨가 올린 소득에 대해 수차례나 자신에게 세금고지서가 발부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진짜 조태훈(34.무직.광주시 서구)씨의 신고로 경찰에 덜미를 잡힌 것이다.

金씨의 남의 명의 생활은 94년 당시 중국집 배달원이었던 조씨의 주민등록증을 훔치면서 시작됐다. 젊은 시절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예비군 소집에 응하지 못해 93년 주민등록을 말소당하는 바람에 주민증 없이는 예금통장 개설이 불가능했던 것.

金씨는 95년 초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앞 모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업, "주문 전화를 끊는 순간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번개 배달'로 일약 고려대의 명물로 부상했다.

시간이 없는 교수들을 위해서는 자장면을 미리 비벼줬고, 한 잔이 생각나는 학생들에겐 통성냥 대신 소주를 끼워주는 등 나름대로의 고객만족 서비스를 실천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자신에 찬 모습과 서비스 자세에 주목한 고려대 경영대 朴모 교수는 97년 '고객만족경영' 일일강의를 맡겼고, 이를 계기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관공서.기업체 초청 강의만 2천여회에 이르러 수억원의 강의료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혼인 신고를 하러 갔다가 구청직원이 "번개 조태훈씨 왔다"며 알아보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야 했고, 일곱살.두살배기 아들들은 부인의 호적에 올려야 했다.

金씨는 "차라리 후련하다. 죗값을 치르고 이름을 찾아 떳떳한 아빠로 살겠다"고 말했다.

광주=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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