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논의 개방」 전제로 한 휴전 제의|노 민정 대표의 회견 내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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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의 22일 기자 회견은 대통령의 국정 연설에서 제시된 정치 일정을 민정당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는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부여해야 할 것 같다.
노 대표의 회견 내용은 국정 연설에서 제안된 「88년까지의 개헌 논의 유보」라는 정치 일정을 바탕으로 삼아 야당측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정쟁의 지양을 제의하면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두 행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모든 정파와 국민에게 「86·88거국지원협의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했다.
말하자면 한쪽으로는 정치의 전면 휴전을 제시하고, 다른쪽으로 모든 국민에게 86, 88행사에 대한 국민 총 참여, 즉 국민적 단합을 호소한 것이라 하겠다.
민정당은 이와 같은 제안의 바탕으로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가지는 이른바 「큰 정치」이고 또 한가지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일정 기간 후 「헌법 논의의 개방」이다.
우선 민정당측은 앞으로 3년간의 국가적 대사는 개헌 논의가 아니라 △평화적 정권교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전쟁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남북 관계 정립도 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즉 민족적·국가적 운명을 좌우할 국가적 대사들을 거시적 시각에서 접근해 가는 것이 「큰 정치」이고,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개헌 논쟁은 한낱 당리당략적인 것이며 자칫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의 난국을 자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같은 소모적인 정쟁을 『불과 몇 해의 시차를 두고』국가적 대사 이후로 돌리자는 말이다.
노 대표의 회견은 이 같은 개헌 논의의 유보라는 정치의 제한적 휴지를 제안하면서도 개헌 논의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노 대표는 개헌의 유보가 『단순한 헌법 논의의 유보가 아니라 개헌 논리를 포용하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긴 것』이며 『그 내용과 결과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로 임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노 대표는 89년 이후 일단 헌법 논의가 시작되면 비단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논의될 수 있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개헌 논의의 내용이나 결과에 대한 이 같은 개방적인 태도는 중요한 몇 가지 시준를 갖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우선 「모든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나 『헌법 논의의 내용에 대한 개방적 태도용의』 표명은 지금까지 여권이 극력 혐오해 온 대통령 직선제 주장도 대상에 넣을 수 있다는 수용 자세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동안 야당이 주장해 온 개헌안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하자면 89년 이후 개헌 논의의 전면 개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야권 일각에서 제기돼 온 내각책임제 이원 집정제 등도 논의의 대상에 포함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비록 89년 이후라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헌법 문제에 대한 이 같은 개방적 자세는 직선제를 금기시했던 그 동안의 여권 내 분위기를 감안해서 본다면 개헌 논의에 대한 입장이 상당히 전진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헌법 논의의 결과」에 대해서도 개방적 태도로 임할 용의가 있다는 말은 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89년 개헌 논의의 결과에 따라서는 개헌을 긍정적으로 고려한다는 뜻이 함축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노 대표의 전면적인 정쟁 지양제 의도 이 같은 89년의 「개방적인 개헌 논의」라는 보다 적극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삼음으로써 논리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하겠다.
또 이와 같은 제안을 민정당 차원에서 밝힘으로써 89년까지 개헌 논의 유보라는 정치 일정을 민정당의 정치 일정으로 「보강」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당장에 개헌 논의에 대한 정치적 수요를 감안해 국회에 헌법연구특위는 설치해도 좋다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개헌 논의가 사회적 확산이 되지 않고 장외 투쟁 대상이 되지 않도록 개헌 논의가 배출될 수 있는 「출고」는 열어 주겠다는 것이다.
민정당은 이와 같은 입장에서 지금까지 무엇이든 법으로 다스리겠다던 강경한 자세를 조금 누그러뜨려 의원 기소 사태로 번진 의사당 사태도 국회법 개정이라는 조건을 붙여 국회 차원에서 관대한 처분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신축성 있는 태도를 보였고, 국회도 봄·여름 두 차례 열어 민생 특위·남북대화지원특위 같은 것을 야당과 협의해 구성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야당에 대한 이러한 유화 제스처에는 물론 정쟁의 전면 지양이라는 기본 목표를 관철하기 위한 여건 조성이라는 의미도 포함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민정당의 정쟁 지양이라는 기본 목표 자체가 야당의 협력 없이는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초정파적 기구여야 할 86·88거국지원협의회도 야당의 참여가 있을 때 실질적인 국민적 단합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정당측은 야당측에 대해 88년까지 개헌 논의의 유보 정쟁의 지양이라는 정치 일정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 대표 회담 같은 고위 정치 회담·막후 고위 협상 등 광범하고 다각적인 접촉을 전개해 나갈 작정이고 그 결과가 관심의 표적이 아닐 수 없다.
야당측도 원내에서의 개헌 논의를 반대하지 않고 있으며 86∼88년의 큰 국가적 행사에 대해서는 협력할 수 있다는 용의는 표명하고 있다.
다만 89년이라는 3년의 시차와 그때의 개헌 논의의 성격이 여야간의 대화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논의돼야 할 대목이 될 것이다.
민정당으로서는 89년의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개헌 논의 용의를 바탕으로 야당측을 납득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 동안 축소 지향적이던 여권의 헌법 논의 자세와 비교하면 노 대표의 이번 회견 내용은 보기 드문 큰 타협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계기로 여야간 절충을 통해 큰 타결이 시도 될 것으로 보인다.
여권 안에서는 89년의 개헌 논의라는 정치 일정이 제시됨으로써 사실상 89년에 가서는 개헌 논의가 피하기 어려운 대세가 될 것으로 예상하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89년 논의에 대비한 여권의 노력 내용이 어떤 것이냐 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더욱이 노 대표의 회견은 단순한 기자 회견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정당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민정당의 공약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것으로 보아야 하며, 또 그것은 민정당이 88년에 내세울 후보군의 입장을 제한하는 것으로도 보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같은 정치 일정의 제시는 민정당의 정치적 반경을 규율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민정당측의 대야 설득 작업 성과가 앞으로의 정국 향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김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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