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9) 제82화 출판의 길 40년(62)-「대한출판문화협회」창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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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47년 2월이라면 8·15해방 뒤 햇수로 3년째다. 해방의 흥분도 가라앉기 시작하고, 치안도 미군정 아래서지만 비교적 잘 유지된 때였다.
우리의 을유도「아협」사업의 활발한 활동과 병행하여『조선문화총서』제1집의 출간이 눈앞에 있었고『우리말 큰사전』제1권이 진행중이며 자못 출판사업의 기초를 애써 다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이럴 때 불쑥 튀어나온 것이 「좌익출판협의회」였다고 생각된다. 이「좌협」의 모인 목적은 이러했다.
『무질서하게 홍수 같이 출판되는 좌익서적에 대하여 상호 협조하는 동시에 종이의 낭비를 억제하고 규율 있는 보급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것이다. 이「좌협」모임에 자극되어 양식 있는 출판인들 사이에「조선출판문화협회」의 설립준비 움직임이 나타났다. 49년4월에 발간된『출판대감』에 실은「출협소사」에 의하면「좌협」이 조직된 뒤 수개월후인 1947년2월 초순께 도서출판업자를 중심으로 한 조직체를 준비할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2월15일 하오1시 종로 영보그릴에서 고려문화사·정음사·을유문화사·건국사· 대성출판사·창인사·국제문화협회·박문출판사·서울신문출판부·문우서관·「좌협」등 11개사 대표가 모여 발기인회를 가졌다.
또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2월25일 출판인 1백4인이 참석한 발기인 총회가 있었다. 발기인 총회에는 내빈으로 미군정 공보부 고문인「스튜어드」씨도 참석하여 축사를 했었다. 회의 진행 집행부 선출에서는 의장에 조벽암, 서기에 김창집씨로 결정되었다. 다음은 김형찬씨의 경과보고와 성인기씨(조선일보 편집국강 등을 역임한 언론인)가 발기취지를 설명하였다. 다음엔 이정래씨의 낭독으로 규약초안의 축조 심의에 들어갔다.
그중 ①신 철자법 실행 ②출판자재의 주선 ③출판사업에 관한 조사 연구개선지도 ④인세 및 원고료 조정 ⑤우량출판물 장려 등의 조항을 사업에 추가하기로 하였다. 이어 회칙기초위원의 선출이 있었는데 김창집 최영해 이계하 조벽암 노영기씨 등 15명을 선출했다. 그로부터 1주일후인 3월2일 정음사에서 동 기초위원회를 열고 조문 정리작업을 시작했다.
이 회칙기초위원회도 출판계의 좌우합작을 방불케 하는 것이어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회칙초안이 준비됨으로써 1947년3월15일 하오 1시 YMCA 강당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사회는 좌익출판계의 조벽암씨(건설출판사 대표)가 맡게 되었다. 가입회원 1백23명 중 71명의 참석으로 회의 정족수 과반수는 초과했으나 출석률은 예상보다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 당시도 온건한 중도적 입장을 가겠다는 출판사들은 이 모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창립총회 1호 의안인 조선출판문화협회 회칙통과의 건은 조벽암의장의 제안설명이 있은 뒤 몇 회원의 질의가 있었을 뿐 전문 7장 31조의 회칙이 만장일치로 무난히 채택되었다.
동회칙 제3조(목적)는 「본회는 출판자유의 확보와 조선출판 문화의 건설 및 향상·발전과 동업자간의 상호친목을 목적으로 함」이라고 밝히고 동회가 지향할 출판자유의 기치를 세웠던 것이다.
여기 대한 출판문화협회의 창립역사란 의미에서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이사 20명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김창집 최영해 김형찬 조벽암 최준 김준수 정현웅 오억 이계하 권혁창 김정수 황종수 이석중 지봉문 성인기 김경배 이수형 추종수 이정래 노영근씨 였으며, 검사위원에 김시필 최장수 이응규씨 등 3명이었는데 제1차 임원회는 회칙에 따라 위원장에 김창집씨를, 부위원장에 최영해 조벽암 양씨를 선출했다. 당시 출협 사무실은 서울 북창동 93의20 정음사의 호의로 동사 안에 방 하나를 쓰게 되었다. 그 후 출협은 셋집으로 전전하다가 1976년 당시 출판인의 회관건립에 대한 염원이 달성되어 이것이 오늘의 종로구 사간동 105의2 검은 벽돌로 4층인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첫 출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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