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6)-출판의 길 40년(59)|도서공급체제와 판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해방직후 몇달동안은 신간을 공급하는 서점의 기능이 사실상 끊겼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방된 그해 11월께로 기억된다. 해방 직전까지 관훈동에서 삼중당 서점을 경영하던 서재수씨가 구 일본서적배급주식회사 경성지점 사원으로 있었던 신장호·이재복·이회백씨등을 규합하여 책 정가 5%의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전량 위탁제의 서적도매상을 차렸다.
이것이 해방후 처음인 도서도매기구였다. 경영주 서씨는 워낙 10대 소년시절부터 도서공급업에 종사했던 관록과 성실한 인품으로, 또 신·이·이 3씨의 실무경험을 살린 도매업 운영은 출발에서부터 순조로왔던 것이다.
한편 당시 소매서점의 이윤은 책 정가의 2할을 확보해 준다는 거래조건을 정했다.
당시 노점아닌 서점에서 판다는 책도 지질도 나쁘고 대개 구지형을 재판한 빈약한 모양이었으나 출판사의 기획은 해방된 사회의 일시적 도서기근과 같은 현상인지라 무엇이나 잘 팔렸다.
한편 그때는 판매가 거의 현금거래였다. 지방 서적상들은 대개 서울에 올라와 등짐으로 책을 나르는 형편이었다. 자기 힘만큼 등짐에 넣고 나머지는 우편소포로 부쳤다. 당시 지방 서적업자들은 도서공급을 건국사업에의 동참으로 믿고 이렇게 땀을 흘렸다.
미상불 해방직후엔 사회혼란으로 인하여 수송질서마저 어지러웠다. 지방 서적상들이 돈뭉텅이를 갖고 와서 구입한 책을 룩색에다 넣어 젊어지고 직접 트럭이나 기차에 실어 가지고 갔었다. 당시의 기차란 의자 하나없이 다 부서진 화물차로 전후 미복구의 살벌한 상황이었다.
거래도 지금같이 외상·월부·후불같은 일은 생각조차 할수 없었으며 오히려 출판사에 선금을 맡겨 두었다가 그 금액 한도내에서 책을 찾아가며, 돈이 떨어져 가면 또 선금을 맡기곤했다.
이같은 출판계 호시절을 당시초·중등 학교교재를 내던 출판사 직원의 이야기에서 들었었는데 지금의 형편과 비교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 이야기 같기만 하다. 지금 어린이도서 출판의 명문 계몽사회장 김원대씨도 당시 대구에서 계몽서점을 시작하였는데 그분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지금 어느 시의 어느 서점은 1년전에 납품한 대학 교재의 책값을 학교에서 수금하고도 1년이 가깝도록 대금 결제를 미루는등 상거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사례가 있어서 그 내막을 알아 보았더니 그 서점이 위탁서적의 판매대금을 유용하여 양계업을 차렸다는 후문을 들었다.
한국출판 40년래의 현안인 도서유통의 불비에 대하여 그동안 우리 출판계의 무능을 드러낸일로서 자책을 금할 수없는 심정이다.
1946년의 한해도 가고 47년에 접어 들면서 출판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서울종로에는 삼중당을 비롯하여 서판(일성당의 후신)·문연·한양·영창·숭문·한도 등의 도매상이 줄이어 나왔다. 우리 을유도 그해 3월을 기하여 종로2가 15번지에 직매점 문장각을 개설하였다.
본사 영보빌딩 건너편에 자리잡은 이 문장각은 나의 가까운친구인 엄병률형을 맞아 책임을 지웠다. 엄형은 당시 정구선수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문장각에서는 우리 을유간행 서적은 물론 다른 출판사의 책까지도 춰급하여 도매점구실을 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서점 문장각의 초창기는 엄지배인 자신이 직접 자전거에 책을 싣고 각 학교에 배달하는등 바삐 뛰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