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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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요즘은 외국엘 가도 백화점을 기웃기웃할 일이 없어 좋다. 모두가 그게 그거다. 손톱깎이 하나를 보아도 신기하던 시절은 옛날이다.
그러나 쇼윈도 앞에서 때때로 깜짝 놀랄 경우가 있다. 가령 점퍼에 써 붙인 가격표시를 『2백마르크겠지!』하고 다시 보면 영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실제로 이런 경험도 있었다. 비엔나의 한 가방 상점에서 괜찮아 보이는 서류가방의 값을 치르려는데 점원이 이쪽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표시가의 10분의 1을 내놓았던 것이다. 미국달러로 7백20달러쯤 되는데 설마하고 72달러를 내놓았다.
우리나라 백화점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상품같은데 왜 그리 비싼가.
디자인 값이다. 유럽의 이 나라, 저 나라 쇼 윈도를 들여다볼 때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은 이제 유럽에선「상품의 질」 시대는 벌써 졸업했고, 디자인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엔나 도심, 국립오페라극장 옆의 한 카페에서 만난 청년은 자동차거울 디자이너였다. 연수가 3만달러쯤 된다고 했다. 입장료 50달러(한사람) 짜리 오페라를 부인과 함께 감상할 만도 했다.
쇼 윈도 속만이 아니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디자인 아닌 것이 없다. 가로수조차도 나라마다, 도시마다 개성이 있었다. 우산 모양, 애드벌룬 모양, 아니면 콤파스로 잰 듯한 재단…가지각색이다.
제네바의 가로등은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모양이 아니다. 길 한가운데에 빨랫줄 같은 것을 걸치고 가로등을 매달아 놓았다. 전기등만 파는 가게를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빛의 교향악을 이루고 있다.
가구도, 자동차도, 식기도 재질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문제는 디자인이다. 파리엔 자동차가 길을 메워도 똑같은 차를 보기 어렵다.
자동차의 홍수가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의 홍수다.
파리의 유명 부티크 (의상) 점은 옷가게가 아니라 디자인 가게다. 이들은 색의 마술사라도 되는 양 섬세한 델리커시로 사람들을 매료한다. 역시 컬러 디자인이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구시가 중심에 있는 레지당스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서울의 명동같은 곳인데 상점의 간판들이 장관이었다. 그것은 간판예술의 전시장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서 정말 쇼핑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 디자인술이다. 디자인 없이는 누구의 주목도 못받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의 카네기 멜런대학에서 신입생부터 상급생에 이르기까지 「디스커버 디자인」 (디자인을 찾자) 교육을 시키는 이유를 알만하다. 【비엔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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