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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라 불리는 곳에서의 소설 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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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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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집권 여당이 총선에서 참패했고 대통령 지지율이 최저인데도 대통령은 “일관성 있게” 또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이를테면 (‘기간제법’ 및 ‘파견법’ 개정을 포함한) ‘노동개혁’ 같은 것을 말이다. ‘노동개혁’이라는 말은 이상하다. 이미 50%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임금의 절반만 받으며 고통 받고 있는데, 지금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해고가 쉬워질 거라 비판 받는 정책을 강행하는 것이 어째서 ‘개혁’인가. 고통을 더 개혁해야 하는가. 고통을 개혁하면 무엇이 남는가.

김이설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

이미 이 나라에 고통은 충분하다.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신곡』 지옥편, 제3곡) 단테는 지옥을 ‘희망 없음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라 했는데 국민은 이 나라를 지옥(‘헬조선’)이라 부른다. 과장이 심하다며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 투표를 해서 과반수 가결이 돼야 지옥이라 인정할 것인가. 설사 당신은 아니더라도 누군가 지옥이라 느낀다면 지옥이다. 객관적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릴 문제가 아니라 주관적 실감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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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를 낸 김이설씨. 시대와 사회의 폭력성을 들춰낸다. [중앙포토]

김이설(41)은 이런 대한민국의 소설가다. 집요하게 ‘지금 여기’의 끔찍함을 재현한다. 재현은 생각만큼 쉬운 기술이 아니다.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유서 깊은 논의에서 ‘재현’이란 현상의 복사가 아니라 본질의 장악이다. 남길 것과 지울 것을 선택하는 지성이 필요한 일이다. 또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느끼지 않은 고통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함께 앓아야 하는 이런 소설 쓰기란 얼마나 격심한 감정노동일 것인가.

신간 『오늘처럼 고요히』에 수록된 ‘아름다운 것들’에서 정리해고에 맞선 오랜 투쟁 끝에 남편이 자살하자 아내는 분노한다. “남편의 이기심은 치졸했다. 어떻게 자기 혼자 살겠다고 자기만 죽을 수 있는가.” 그러다가 남편이 막대한 치료비가 드는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내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프다고, 고쳐보겠다고, 정말 살겠다고 했다면 내가 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의 이 ‘분노’와 ‘감사’ 속에 지금 여기의 본질이 짓이겨져 담겨 있다. 이 지독한 고통을 그 어떤 문장으로 감히 요약할 수 있을까.

타인의 지옥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 방치 자체가 지옥의 구성 요소가 될 것이다. 과장된 불평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실토하자면 나는 김이설의 소설은 읽기가 괴로워 피해 다녔는데, 고통을 느끼기 싫다는 이런 욕망조차도 여기에 이미 존재하는 고통들에 대한 폭력일 수 있다. 김이설이 소설을 써야 하고 또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최소한 그런 폭력에는 가담하지 않기 위해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