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 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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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섬의 대부분이 산악으로 덮인 대마도가 남성적이라면 이끼(일기)도는 여성적이다. 현해탄에 떠있는 녹색의 섬. 예부터 해변의 모래가 눈같이 희고 해안선의 굴곡이 심해 섬전체가 마치 눈(설)의 결정을 닮아 설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섬전체가 평평해 산등성이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인구 5만, 면적 1백39평방km로 대마도의 5분의1.
섬의 동남단 이끼공항에서 북부 가쓰모또(승본)에 이르는 동안 차장으로 들어오는 들판의 정경은 흡사 우리나라 농촌같다.
가쓰모또는 대마의 이즈하라(엄원)를 떠난 통신사 일행의 다음기항지. 일명 가자모또(풍본).
일기가 나빠 가쓰모또에 배를댈수 없을땐 남부 고우노우라(향포)에 대기도 했다.
이즈하라에서 21일간을 머문 통신사 일행은 대마번주의 선도로 이끼로 향한다. 이때 통신사의 안내와 경호를 위해 따라나서는 무리는 번주이하 8백∼9백명. 통신사 일행이 4백79명이니 모두합치면 한마을의 이동과도 같다.
신유한공은 『해유녹』에서 『따라나서는 왜인들은 그 수가 많아 몇천이며 대소의 배들은 몇백척이나 되고 가지고 가는 의복이나 양식·기구등이 몇만을 헤아려야되니 마치 온섬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다』 고 적고 있다.
정사의 배엔 「정」자를 쓴 파란기가, 부사의 배엔 「부」자를 쓴 노란기가, 종사관 배엔 빨간기가 각각 펄럭였다. 이는 각번의 영호선이 멀리서도 각자 호위할 사신의 배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크고작은 배 수백척 헝형색색 기로 장식>
이끼도는 비전번 소속.
이끼에 가까와오니 비전번의 영호선 1백여척이 마중나온다. 배마다 파랑·노랑·빨강기를 달았다. 즉시 세 사신의 같은 깃발을 찾아가 호위· 인도하는데 한치도 틀림이 없다.
『포구는 물이 얕아 배가 더 들어갈 수가 없다. 작은 배 수십척을 이어서 잔교를 만들어 그 위에 판자를 깔고 좌우에 대나무 난간을 달았다. 겹으로 된 돗자리를 사관에 이르기까지 깔아두었는데 볼만하다. 해안을 끼고 구경하는 자들이 산에 가득히 서있다. 붉은 옷을 입은 자들이 과반이나 푸르고 흰 알록달록한 옷들이 섞여있어 마치 봄의 숲이 우거진곳에 백화가 요염함을 다투는 것 같다.』
신공은 구경꾼들이 사흘간이나 흩어지지 않고 산과 언덕에서 밥을 지어먹고 자는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대마번의 「기실」인 「아메노모리」(우삼방주)와 「마쓰우라」(송포하소)가 신공을 찾아왔다.
『이야기를 마치고 행장 가운데서 자화주를 내어 밀과를 안주로 해서 마셨다.
「마쓰우라」는 본래 술을 즐기나 두잔을 마시더니 곧 그치면서 <조선의 술맛은 대단히 독하다.도저히 더는 마실수가 없다>고 한다. 그때 거문고 하나가 내옆에 세워져 있었다. 그가 그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내가 <옛 거문고다. 그 소리를 한번 듣고싶으냐>고했더니 <간절히 원하지만 감히 청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나는 곧 악공을 불러 한곡조 켜게 했더니 그는 놀랍고 즐거워 웃는데 마치 정신을 잃은것 같았다.』

<구경꾼 사흘간 운집|산·언덕서 잠자기도>
이제 가쓰모또항은 근세 포경기지의 이력을 말해주듯 정연한 항구로 변해 당시 배를 댔을 만한곳은 모두 매립돼 흔적이 없다.
다만 객사가 서있었을 산비탈 아래에 당시의 가옥 몇채만이 남아 주변의 우뚝한 새 건물에 포위돼있다. 구옥사이로 아직도 옛모습을 간직한 비좁은 뒷골목에서 당시 가마를 타고 왕래했을 일말의 자취를 읽을수 있었다.
지금 이곳 역사의 현장은 묻혀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바람이 센 탓인지 오늘따라 어선들은 목을 매고 웅크린 채 떠날 채비를 안한다. 해변의 어느것도 꼼짝 안하고 문은 닫혀있다. 집집마다 빨아 널어놓은 옷가지들만 요동칠 뿐 항구는 한가롭다.
이 외딴 항구를 부지런히 넘나들었을 선조들의 자취를 찾아 2백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뒤이렇게 와 섰다. 아무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달려온 고난의 시대를 털어보낸 것인가. 이제 겨우 한숨돌려 외딴섬에 묻힌 선조의 숨결까지도 찾게 된 것이 아닌가.
이들이 일궈놓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 명치유신까지 2백60년간의 한일선린우호의 길.
-왕난이란 역사적으로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딛고 어떻게 곧바로 선린관계를 틀수 있었습니까.
『조선정부의 임난에 대한 단호한 전후처리방침, 그리고 일본정부의 침략에 대한 깊은 반성이 이를 가능케 했지요.』

<사명당을 심족사로 경계하며 선린꾀해>
이진희교수는 임난직후 「도꾸가와」 막부의 국교회복공작이 조선측의 심한 대일감정 때문에 쉽게 이뤄질 수 없었다고 말한다.
1601년 대마번주 종씨는 사신을 보내 풍신수길이 저지른 죄악행위를 깊이 사죄하면서 잡아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전부터 조선무역의 이윤이 주된 경제적 기반이었던 대마변주는 그후 여러번 사신을 보내 국교회복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반면 세끼가하라(관아원) 전투에서 대권을 잡은 「도꾸가와·이에야슨 는 적극적으로 교린관계의 회복을 꾀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1605년 사명당을 「탐적사」로 파견했다. 일행은 복견성에서 「도꾸가와·히데다다」(덕천수충·2대)를 만나 교린친선관계 수립에 앞서 두번다시 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1607년 일본이 파견한 화평사에 대한 회례겸 극쇄사로서 여우길 일행을 파견했다.
『「쇄환사」란 풍신수길이 납치해간 사람들을 조사해 귀국시키는 사명을 띄고있었지요. 명칭에서도 전후처리에 절도를 지키려는 조선측의 자세가 드러나있읍니다. 여일행 (5백여명) 은 4척의 배에 분승, 대마도로 갔다. 대마번주 종의지의 안내로 수도 에도(강호)로 향했다.
「도꾸가와·히데다다」와 국서를 교환, 「무로마찌)시대 이래의 우호친선관계가 다시 회복됐다. 사절 일행은 돌아오는 연도에서도 납치된 사람들을 찾아내 1천4백여명을 데려왔다.
한편 1609년 국교회복을 축하하는 일본측 사절(3백여명)이 파견됐다. 그러나 조선측은 사절단의 상경을 허가하지 않고 부산포에서 맞았다.
이는 임난당시 왜범이 「무로마찌」시절 일본사절들의 상경길을 따라 일거에 서울까지 쳐들어온데다, 풍신일족이 아직도 남아있고「쇄위」 또한 끝나지 않았으므로 「도꾸가와」막부에 대한 불신감이 깨끗이 씻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후 관례가 돼 막부에서 파견하는 사절은 상경할 수 없게됐다. 조선측의 에도 막부에 대한 외교는 「경계하면서 교린하는」 것이었다.
왕난과 일제35년의 피해는 어느편이 더 무겁다고 보십니까.
『같은 자로 잴수는 없지만 임란의 피해가 일제35년의 피해 못지 않았다고 봅니다. 왕난후 다시 허리를 펴는데는 1백년이 걸렸으니까요』
이교수의 말이다.
이렇듯 선조들이 임난의 무거운 역사적 상처를 딛고 엄정한 전후처리를 거쳐 한일선린외교를 편 점을 생각할때 오늘 우리는 얼마나 전후처리를 잘하고 선린우호를 외치고 있는지 한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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