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10억이 딱 좋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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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당첨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워할까.

당첨금 지급을 담당하는 국민은행 복권사업팀 관계자들은 "10억 안팎의 당첨금을 타갈 때 가장 행복해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당첨금이 클수록 보호본능이 강하고 주변에 노출될까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

사설 경호원까지 대동하고 당첨금을 찾으러 온 사람도 한명 있었다. 상대적으로 2등 당첨자들은 부담이 없다. 다른 당첨자들과 "다음에는 1등에 당첨되자"는 덕담을 나눌 정도로 화기애애하다.

국민은행 복권사업팀 이인영(47) 부장은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외국에서는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남이 잘되는 모습을 못봐주는 통에 음지로 숨어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1등 당첨자들은 대개 아내.형제.부모 등 가까운 가족 한두 명과 함께 당첨금을 타러 온다. '로또에 당첨되면 이혼부터 하겠다'는 유머는 그저 유머일 뿐인 모양이다.

지금까지 혼자 당첨금을 타러 온 사람은 딱 한 명. 낭비벽이 생길까봐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60대 남성이었다.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고 여자 친구와 함께 온 30대 미혼 남성도 한 명 있었다.

'당첨이 돼도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망한다'는 루머가 사실일까. 이부장은 "외국의 사례 조사에 의하면 당첨자의 97%는 삶의 질이 나아졌고 3%만 무분별한 씀씀이로 삶의 질이 악화됐다"며 "로또 당첨자들과 재테크 상담을 해 본 결과 대체로 신중하고 냉철했다"고 설명했다. 당첨금을 받자마자 전액을 예금한 당첨자도 있었다.

나눠 쓸 줄도 아는 당첨자라면 더 환영받는다. 이부장은 94억원 중 10억원을 쾌척한 14회차 1등 당첨자를 가장 인상깊은 당첨자로 손꼽는다.

"당첨금을 받자마자 10억을 기증하겠다기에 가족과 상의하라며 말렸죠. 그런데 며칠 뒤 찾아와 5억원짜리 수표 두장을 내밀더군요."

복권사업팀 김효신(34)과장은 2등 9천만원에 당첨돼 1천만원을 기부한 20대 후반의 미혼 남성을 꼽았다. "애인에게 맛있는 것 안 사주느냐"는 김과장의 물음에 그는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사줄 수 있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로또 당첨자들이 기부한 당첨금은 공개된 것만 42억8천여만원이다. 1등 당첨자 중 3명, 2등 3명, 3등 2명이 기부했다. 9회차까지는 기부자가 전혀 없었지만 10회차 이후 조금씩 느는 추세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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