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만에 확 바뀌는 지폐] 어떻게 추진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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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년간 논란을 거듭해 온 세 가지 화폐 개혁방안은 결국 새 지폐만 도입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에 따라 23년 만에 새 지폐가 내년 상반기 중 등장하게 됐다. 대신 정부는 고액권 발행과 액면단위 변경(리디노미네이션)은 추진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이같이 교통정리했으며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최근 이를 서둘러 공표했다.

시장의 불필요한 오해와 억측을 줄이기 위해서다. 이들 세 가지 방안을 모두 추진해 온 한국은행은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지만 지폐의 도안 변경도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한은은 이를 위해 이미 3년 전부터 외국의 지폐 도입 변경 현황을 연구하고 신권 발행을 비밀리에 준비해 왔다.

◆ 새 지폐 왜 나오나=현재 유통되고 있는 한국은행권의 기본 도안은 1983년 도입된 이래 23년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 사이 선진국에서는 지폐가 국가의 경제적 위상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떠오르면서 다채롭고 화려한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면서 위.변조 방지를 위해서도 지폐의 도안은 수시로 변경됐다.

반면 국내 지폐는 국민소득 수준이 5000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 만든 도안을 그대로 쓴 탓에 탄자니아나 에티오피아 등 후진국보다 뒤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위조지폐도 날로 늘어나 유통질서를 어지렵혔다. 지폐가 선진국에 비해 너무 크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하지만 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화폐 관련 개혁을 가로막았다. 고액권 발행은 뇌물 수수를 부추기고, 화폐의 액면을 선진국 수준으로 줄이는 것은 금융 질서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정치권이 앞장서 반대했다. 더구나 동전과 지폐를 아우른 화폐 발행과 관련된 모든 권한은 재정경제부가 갖고 있어 한은의 구상은 번번이 좌절됐다.

그러던 중 한 부총리와 박승 한은 총재의 만남이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다.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에 걸맞은 화폐의 선진화를 주장해 온 박 총재의 의견에 한 부총리가 공감했고, 한 부총리는 노 대통령에게 현재 경제상황에서 혼란을 부를 수도 있는 고액권과 액면 변경은 하지 않되 너무 뒤떨어진 지폐 도안 변경의 필요성을 설명한 것이다.

◆어떻게 준비했나=한은의 준비작업도 치밀했다. 지폐의 가치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지폐의 도안을 변경하는 것은 적지않은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은은 선진국 45개국의 지폐 도안 변경 사례를 수집하고, 국내 지폐의 평균 크기가 선진국보다 10%가량 크다는 점을 다각도로 제시했다.

발행이 결정되면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감안해 한은은 이미 신권의 인쇄 시설과 재료는 물론 1900억원에 이르는 재원을 모두 확보해 뒀다. 지난 3월에는 충남 부여에 신권 발행을 위한 인쇄공장을 준공했다. 새 5000원권은 오는 11월부터 제조되지만 한은의 정부 및 정치권에 대한 설득작업과 인쇄 준비작업은 최소한 3년 전부터 진행돼 온 것이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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