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혜초의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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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승하(1960~ ), '혜초의 시간'

또 다시 황사바람이 불어와 눈 비빈다

이 모진 바람 언제부터 불어왔을까

산맥을 넘고 사막을 지나온 시간

바위가 돌이 되듯 세월 부서지고

돌이 모래가 되듯 시간 쌓였으리

돈황 막고굴에 봉인되어 있던

혜초의 시간 장장 1200년

그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면서 참 많이도 울었으리 눈물 없는

서방정토를 꿈꾸며 그렸을까 둔황벽의 그림을

시간은 바람처럼 왔다 물처럼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땀 흘리며 그려내는 것

둔황 가는 길 다리 아파 밤하늘 우러르니

캄캄한 저 하늘에 가불가물 별빛 하나

고개 끄덕이며 내 가슴에 불 박힌다



1908년 중국 둔황 석굴에서 발견한 낡은 두루마리. 바로 신라의 고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필사본. 천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 태어나고, 잊혀지고. 오늘 내 시간의 필사본엔 파미르 고원을 넘어가는 고독한 수도승이.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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