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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2015 : 무력감, 그 소리 없는 아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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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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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한 해를 초승달만큼 남겨 놓고 회상에 잠긴다. 올해는 세계 전체가 위축되고 무력감에 빠진 한 해였던 것 같다. 사건과 문제는 쌓여가는데 리더들은 웅크리기만 하면서 세계가 신뢰상실에 빠지고 있다.

과잉이념 사회 속에서 문제 해결능력과 국가 리더십 동반 추락
큰 바위 얼굴 발굴이 2016·2017 정치의 계절 맞는 국민의 소임

 금세기 들어 세계의 최종대부자(最終貸付者)를 자임해 왔던 미국 등 세계 리더 국가들은 각자도생적 생존방정식에 매달리며 세계 문제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해 왔고, 그동안 이들에게 생명줄을 잇고 있던 후진국과 신흥국들은 크게 흔들렸다. 이러한 신뢰상실의 틈을 헤집으며 이슬람국가(IS) 등의 질서파괴 세력들은 세를 확장해 왔고, 결국 이번 파리 대참사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의 2015년도 극심한 무력감 속에 저물어 간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직 멀었구나’ 하는 한계의식을 느끼며 자괴감에 빠진 한 해였다. 국민들은 세월호 침몰 사건, 메르스 사태의 발생 자체보다는 그 수습과정에서 보여준 난맥상을 보며 비통해했다. 사회 전체가 과잉이념화, 과잉정치화되면서 문제 해결능력이 크게 저하되고, 버팀목인 리더·리더십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치가 수직 하락하면서 신뢰의 위기에 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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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새로 태어날 것은 잘 태어나지 않고, 소멸되어야 할 좀비는 정치적으로 오래 생존하면서 한국의 생태계는 황폐하게 늙어 간다. 꽉 짜인 낡은 담합사회의 높은 진입장벽에 젊은 세대는 좌절하고, 다음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잘 살 것이라는 전망도 점차 희미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황을 뛰어넘을 국가지도력의 부재가 국민들로 하여금 극도의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최근 5년 단임 대통령들은 자신의 정적들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인물들로 정부를 구성했던 링컨 대통령의 열린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고 큰 바위 얼굴들을 기피하고 잘 다듬어진 작은 조약돌을 선호하면서, 역사에 남을 치적을 세우는 데 실패해 왔다.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동여야 하는 정치권은 이익집단으로 폄하되고, 소위 ‘국회선진화법’의 후진성으로 정치협상은 이익의 담합으로 귀결되면서 정치·정책 프로세스는 극단적으로 고비용·저생산성을 보이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칡뿌리 민주주의로 변질되고, 훌륭한 정치 신인들도 금세 동화되며 ‘목구멍이 포도청 정치’를 따라간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풍자되기도 하는 민주화 세력의 후예들, ‘초록은 동색’으로 뭉쳐 자기 이익 지키기에 골몰하는 산업화 세력의 후예들이 정면충돌하며 패싸움판을 벌이는 모습을 우리는 일 년 내내 보아 왔다. 이들뿐 아니라 많은 공인, 준(準)공인들이 당초 본인이 추구하던 가치와 명분을 버리고 생존형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관료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높았다. 과천 청사에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안도했다. 정치권, 심지어 군부세력에까지도 대항하며 정론을 펴는 국장·과장들이 정부에 많이 있었고 그들은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의 관료세계는 세종시에 유폐되었다고 스스로를 자조하며 과잉정치화의 세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위축되고 있다. 이들은 5년 단임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시키는 일만 하다가 보이지 않는 에러를 연발하게 되고, 이를 보는 국민들의 상심은 깊어만 간다.

 한편 국민들은 일부 비난이 있음에도 기업을 대한민국의 경제 국가대표로 생각하며 그들을 열렬히 응원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재벌 3세 경영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부자 3대 못 간다’는 속담과 영화 ‘대부’의 3세를 떠올리기도 한다. 1세 창업주의 통 큰 위험 부담, 자기희생, 높은 창의력과 애국심을 그리워하며 앞으로 3세, 4세 경영자들에게도 과거와 같은 신뢰를 계속 줄 것인지 망설인다. 더구나 새로운 도전 대신 면세점 인가를 따기 위해 매달리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국민들의 무력감은 깊어지기만 한다.

 무력감, 이것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어떻게 국민들을 이러한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의 국가역량은 포화상태에 이른 것인가?

 답은 분명히 우리 앞에 있다. 국정운영의 기본 틀을 바꾸고, 국가지도력을 회복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회운영 등 정치·정책 프로세스를 개혁하고 공공부문을 일신하며, 거대한 담합적 먹이사슬을 구조조정함으로써 생성과 소멸이 원활한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 해답이다.

 그래도 우리 세상은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세계를 다녀보면 한국이 몇 안 남은 살 만한 나라에 속한다는 것을 느낀 적이 많다. 이제 우리 국민들이 부정적 심리에서 벗어나 과잉두려움을 극복해 내고, 생각과 각오를 다시 해야 한다. 정치의 계절인 2016·2017년에는 국민 모두가 힘을 합쳐 난쟁이 조약돌들을 골라내고 장렬하게 전사할 각오가 되어 있는 큰 바위 얼굴들을 다시 세워 쇠락한 국가 리더십을 복원하는 것이 역사적 소명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