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한국은 미국을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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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바깥세계가 보는 미국은 장님 코끼리만지기에 곧잘 비유된다. 지난주 영국 BBC방송이 세계 11개국 국민들과 가진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제의 글로벌 TV토론이 바로 그러했다.

한 이집트인은 할리우드 서부영화에 빗대어 '원조는 좋은 녀석, 정치는 나쁜 녀석, 군사체제는 추잡한 녀석'이라며 미국의 세 얼굴을 질타했다. 한 이란인은 '미국은 우리 시대의 로마제국'으로, 한 영국인은 '오웰식의 빅 브러더'로까지 규탄하는가 하면 한 베네수엘라인은 ' 미국이 없다면 세상은 지루하고 싫증날 것'이라며 미국을 감쌌다.

세계인구의 4%가 세계 총생산의 30%, 군사비의 50%, 인터넷 사용인구의 80%, 1975년 이후 노벨상 수상자의 80%를 차지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추악한 패권주의의 결과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때로는 독재자를 감싸고, 남의 나라 지도자도 갈아치우려든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수백개의 해외군사기지, 그리고 영어와 인터넷으로 세계를 주름잡아 옛 로마제국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비난도 쏟아진다. 그러나 오늘의 초강대국 미국의 존재는 힘의 논리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정치학자 루시안 파이는 미국의 영향력은 헤게모니보다는 인간의 창의성과 진취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미국시스템의 산물임을 역설한 바 있다. BBC방송토론에서도 미국 정부와 그 정책, 특히 중동문제와 몇몇 글로벌 이슈 등에 대한 이중성과 오만을 미워하는 것이지 미국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는 대체로 공감했다.

그러면서 세계에 대한 미국의 최대 공헌으로 대학과 연구시스템을 꼽았다. 미국은 유럽 주요국과 정보기술력에서는 10년, 이를 바탕으로 한 무기체제는 20년 정도 격차를 벌려놓은 현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번 글로벌토론에서 한국인의 미국 보는 눈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일관성이 없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은 점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테러 응징을 지지하면서도 이라크전쟁은 반대하고, 그러면서도 파병은 하고, 세계가 비난하는 지구 온난화문제에 관한 미국정책에는 압도적 지지를 보낸다. 이는 한국인들이 정작 미국을 모르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BBC측 지적은 듣기에 민망하다. 그만큼 우리의 대미 인식과 행태가 갈피를 못잡게 만든 측면이 적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반미(反美) 의식화교육이 사회문제화하면서도 어학연수와 미국유학은 불황을 모른다. 이라크인들의 인권에는 목청을 높이면서도 북한동포 인권에는 침묵을 지킨다.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하면서도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장병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워싱턴 한인들의 여중생1주기 촛불시위에 뉴욕 한인들이 '반미는 용공'이라며 맞불시위를 벌인 것을 미국인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한국인이 미국을 몰라서가 아니라 미국에 관한 지식 및 정보에 편식(偏食)이 심한 결과다. 마음에 드는 정보는 취하고, 자기주장을 펴는 데 도움 안되는 정보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냉탕 온탕식' 미국관은 입장 여하에 따라 엄청난 지식 갭을 불러온다. 촘스키의 '불량국가'가 한국 20대들에게 '성경'처럼 읽히고, 육군사관생도 모집면접에서조차 '6.25가 북침'이란 답변이 나오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반미든 '배미'(排美)든 '극미'(克美)든 '용미'(用美)든 미국을 제대로 알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안보를 미군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가 정작 미국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국제적인 우스갯감인가.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