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 F 때보다 더 손님이 줄었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회사택시를 운전한 지 4년4개월이 된 이경석(李京錫.31)씨가 하루 12시간씩 한달 꼬박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겨우 1백만원 남짓.월급 84만원에 사납금을 채우고 남는 수입을 합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던 환란 때(1999년초)도 한달에 1백20만~1백30만원은 벌었는데 요즘은 더 어렵다고 한다.

"경기가 나쁘다고 하니까 손님이 더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부인과 맞벌이를 하는 그는 "혼자 벌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이씨가 지난 17일 오전 근무(오전5시~오후5시)를 하면서 느낀 단상들을 모아봤다.<편집자주>


▶행인보다 많은 대기 택시들

#오전3시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힘들게 눈을 뜬다.어제 빗길 운전이 힘들었는지 일찍 일어나기가 더 괴롭다.졸리운 눈을 비비며 어제 저녁 아내가 끓여 놓은 미역국에 불을 당긴다.냉장고에서 간단히 반찬을 챙겨 밥을 먹은 후 샤워를 한다.

#오전4시20분

스스로의 자부심으로 오늘도 넥타이를 동여매고 간식으로 먹을 참외와 우유 드링크제 등을 챙겨 집(서울 구파발)을 나선다.

사납금 오늘은 채우려나

#오전 5시

승용차를 타고 서울 답십리에 있는 회사에 도착했다.오늘은 입금 걱정 없이 장거리 손님이나 걸리길 꿈꿔본다.하루 사납금은 9만6천원이다.어제는 비가 온 탓인지 손님들이 많아 간신히 사납금을 주고 점심 식비와 담뱃값정도 남겼지만 집엔 빈손으로 돌아왔다.오전반인 오늘도 사납금 부담이나 없었으면 한다.(오후반은 오후5시-다음날 오전5시)요즘 내가 받는 월급은 26일 만근 기준으로 세전 84만원이다.

한달 전만해도 오후반엔 사납금 내고도 많을 땐 8만원정도 챙겨갔다.지금은 그나마 3~4만원이 고작이다.서울시내 지하철이 새벽1시까지 연장운행하는 바람에 유흥가 손님들도 택시를 타면 집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근처 지하철역까지만 가고 만다.아직은 야간할증 운행때 손님을 태우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그렇지만 새벽2시가 넘으면 거의 승객을 찾기 어렵다.

오전반 마지막날인 일요일 아침 근무를 빼먹으면 4만원씩을 회사에 입금해야 한다.이것 빼고 저것 빼면 한달 수입은 월급과 추가 수입을 합해도 1백만원 안팎에 불과하다.믿을지는 모르겠지만 1999년 2월 택시 운전대를 잡은 후 지금까지 합승이나 승차거부를 한번도 한적이 없다.돈을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한다면 이보다는 더 나을 수도 있겠지.

40분만에 찾은 첫 손님이 취객

#오전6시30분

새벽 첫 운행 목적지는 이른바 '3차 손님'이 있을 법한 곳이다.밤늦게까지 술먹다 아직 귀가 못한 취객들이나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어디있을까 찾아 나선다.

우려했던 일중 하나가 일어났다.그것도 첫 손님에서.답십리를 출발해 빈차로 강남을 배회하던중 지하철 선릉역 근처에서 신호등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무리를 발견하고 건너편에 차를 세웠다.출근후 40분만에 태운 첫 손님이 술에 떡이 된 어떤 남학생이었다.충무로 삼성제일병원까지 간다고 하더니 이내 곤히 잠든다.목적지에 도착해 깨우려니까 아니나 다를까 일어나질 않는다.한참을 흔들어 깨우니 눈을 조금 뜨고는 헛소리를 늘어놓더니 문을 열고는 그냥 내리려한다.

"요금 주고 가셔야죠"하니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 "카드 돼요?"한다.

"일반 택시는 아직 카드결제가 안됩니다"하니까 "어떡하지"만 연발한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다행이다.카드라도 있으니깐.이런 경우 승객 동의하에 편의점 등을 찾아 현금인출후 요금을 받는다.다행히 오늘도 무사히 요금은 받을 수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스타트부터 꼬이니 오늘 일진은 좀 사나울 것 같다.

#오전10시30분

아침의 출근러시가 끝나가는 지금은 손님도 떨어지고 막바지 출근 정체로 재미가 없는 시간이다.경기가 많이 않좋은 관계인지 요즘은 출근을 택시만으로 하는 손님은 많지 않다.주로 집앞에서 승차하면 근처의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하차한다.오늘 아침은 예상대로 별로 재미를 못봤다.

#오전11시

손님을 찾아 돌아 다니다 다시 전농동으로 왔다.여기는 대단지 아파트가 있어서 심심치 않게 콜도 떨어진다.콜 불러 놓고 길에 나와서 기다리지 않고 다른 차를 타고 그냥 가버리는 손님들이 많아 콜이 떨어져도 걱정이다.예약취소나 좀 해주면 좋으련만.집에서 가지고 나온 간식이나 먹으면서 손님을 기다려 볼 생각이다.아마도 오늘은 입금하기 힘들 것 같다.


▶"사납금 걱정없이 푹 쉬어보는 것이 소원이에요"

때놓쳐 점심도 못먹고 간식으로 때워

#오후1시

밥때를 놓쳐 오늘 점심은 틀린 것 같다.이러니 위장병이 생기지.그나마 간식을 가져와서 다행이다.

#오후2시30분

광교에서 충무로 제일병원에 서류를 가져다 주고 와야한다는 손님을 태웠다.청계천 복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지금도 이렇게 막히는데 청계고가 철거 공사에 들어가면 도로가 올스톱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말을 했다.벌써부터 걱정이다.

막판에 장거리 손님 만나 사납금 간신히 채워

#오후4시

충무로 쌍용빌딩에서 송파구 마천동으로 가는 장거리 손님을 태웠다.오늘도 아슬아슬했는데 이 손님 덕분에 지금까지 10만3천8백원을 채웠다.사납금을 제하면 6천8백원이 남았네.점심도 굶었으니까.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다.오늘 손님을 태운 회수는 정확히 30회.손님을 태우고 간 거리는 전체 주행 188.2km중 112.6km.

이제 교대시간이 되어 들어가야 하는데.차고지 근처에서 일이 끝났으면 더 좋았으련만.바로 차고지로 들어가야 한다.늦으면 교대자가 기분 나쁠 테니까.가는 길에 방향이 맞는 손님을 태울 수도 있지만 승차거부를 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어기기는 싫다.

주 5일 근무는 커녕 공휴일이라도 맘놓고 쉬어봤으면

#오후5시

답십리 차고지에 차를 반납하고 하루 일과를 끝냈다.현재 노동계 전반에는 주 5일 근무제 도입이 확산되고 있지만 택시기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주 5일은 커녕 공휴일,아니 명절이라도 사납금 걱정없이 푹 쉬어 보는 것이 소원이다.달력에 빨간 글씨로 써 있는 공휴일은 택시기사에겐 뜬 구름이다.택시기사가 사납금의 구속없이 편히 쉴 수 있는 방법은 연차휴가를 쓰는 방법뿐이다.5년 근속 기사 기준으로 1년에 9일 주어지는 연차휴가도 쓰고 싶을 때 맘 편히 쓸 수 없다.회사택시기사는 일주일에 84시간 근무를 한다.일반 노동자들의 주44시간 근무 기준에 비해 두배 가까운 셈이다.

4년전엔 몸을 혹사해가며 일해 월1백20만~1백30만원 정도 벌었다.개인택시를 하면 한달에 2백만~3백만원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다니던 회사(번역개발원)를 그만두고 자격을 얻기 위해 회사택시를 시작했지만 이렇게 일하다가는 몸이 말이 아닐 것 같아 지금은 무리를 하지 않는다.다행히 아내가 같이 벌어 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

택시 기사 이경석<ziha73@hanmail.net>

정리=한경환 기자<helmut@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