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쓴 편지] 영화 '이도공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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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세상을 떠난 그 분의 기억을 환기시켜 괴로움을 드리는 것을. 캐릭터인 저와 배우가 별개가 아닌 운명임에도, 저는 살아 남았는데 그는 세상을 떠난 황망함을 어찌해야 할지. 영화보다 가혹한 화면 밖 현실 때문이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혹 저와의 만남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아닌지 자책도 합니다.

'이도공간'이라는 영화 속에서 전 정신질환을 앓아 의사로서 새로 태어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친구가 얀이라는 여인을 저에게 보냈을 때 전 유능하지만 오만한 의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파트에서 귀신이 보인다는 얀은 부모와 첫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뇌 속에 저장된 귀신에 대한 정보를 이미지로 형상화" 하는 전형적인 정신분열증 환자였습니다.

전 얀을 첫사랑과 대면케 하고 부모와 화해시켜 그녀를 치료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저에게도 첫사랑 여고생의 원혼이 나타났고, 죽음으로 까지 몰린 저는 결국 그 원혼과 화해하면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와 얀이 본 것은 귀신이지만 그것은 내 속의 상처와 슬픔, 그것을 이겨내려고 했던 아픈 기억의 뭉뚱그림, 즉 우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인생 전체를 통해 짊어져야 할 불가해한 무엇이라는 것을. 저와 장궈룽(張國榮)이라는 배우는 이름이 다른 똑같은 질병을 앓았던 것입니다.

환자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귀신이 저한테 그랬듯 우울은 밀물이 밀려 오듯, 혈관 속에 주사액이 퍼지듯 온몸을 꽉 얽어매 버린다고요. 원혼이 내가 어딜 가도 따라오는 것처럼 이 '우울 바이러스'는 시도 때도 없이 자기들을 후벼판다고요. 그것은 스스로 나약함을 인정할 때 괴이한 실체를 드러냅니다.

기억하십니까. 제 눈에 귀신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가 제가 얀에게 "친구가 되어줘" 라고 말한 뒤부터라는 것을요. 의사로, 일벌레로 살아오면서 행복하다고 믿었던 저는 외롭고 불안한 무의식에 마음을 여는 순간 파도처럼 몰아친 우울과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매일 상처받고 사는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우울증 환자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 실연이, 혹은 퇴직이 계기가 돼 그것이 귀신의 모습으로, 또는 지독한 무력감과 피로감으로, 아니면 불면증이나 자책감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것은 당신을 유혹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껏 행복하지 않았다"고.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순 없다"고. 죽음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사랑이 저를 죽음에서 건졌듯 이 불치병에 맞서는 방법은 사랑과 관심밖에 없습니다. 저처럼 헛것이 보인다고 할 때, 죽고 싶다고 할 때 그들은 외치고 있는 겁니다. 나를 도와달라고. 세상은 살아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이라고. 손을 내미십시오. 그것이 끝없이 상처를 던지며 서바이벌 게임을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나약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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