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부시 입맛 맞추는 '엉터리 정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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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건의 문서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가는 듯하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2001년 말 이탈리아 정보망에 '대어'가 걸려들었다. 나이지리아가 이라크에 우라늄염을 수출한다는 서류였다. 문서는 영국 정보부를 거쳐 딕 체니 미 부통령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2002년 2월 미 중앙정보국(CIA)은 조사 결과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냈다.

서명자라는 나이지리아 에너지 장관이 물러난 지 몇년 됐고 국제 컨소시엄 때문에 나이지리아 정부는 우라늄 수출 문제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힘도 없었다. 그걸로 끝났으면 잘못된 첩보 소동쯤으로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문건은 지난 1월 미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부활, 이라크를 응징해야 한다는 명분의 한 근거가 됐다. 교서에는 "이라크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고강도 알루미늄 튜브를 구입하려 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튜브는 핵무기가 아니라 재래식 로켓 제조용인데 CIA가 엉터리로 보고했다는 게 미 에너지부의 의견이다.

'엉터리 정보'가 쟁점이 되면, 부시 대통령은 부도덕하게 전쟁을 일으킨 대통령이란 오명을 쓰게 되고 재선의 꿈은 환상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한 나라를 무너뜨린 전쟁에 근거를 제공한 정보라는 게 이렇게 허술할 수 있을까. 미국의 정보망에 이상이 생겼을까.

미국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후세인은 나쁜 놈'이라는 대통령의 공공연한 태도가 정보 흐름에 이상을 일으켰다고 입을 모은다. 윗분의 코드에 따라 잘못된 정보가 무의식적인 과정을 거쳐 그럴 듯한 정보로 둔갑된다는 얘기다. 엉터리 정보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입장'이 정보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여기서 끝난다면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 문제에 이 이론을 대입하면 섬뜩해진다. '북한 손보기'를 벼르는 미국 지도부의 코드 때문에 정보 당국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전쟁의 구실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 해결에 '대화 중시'를 강조하는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의 코드도 함정이 있어 보인다.

지나친 코드 집착이 현실에 대한 끈을 놓치게 만들고, 그 결과 국제사회와 틈이 벌어지면서 결국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

안성규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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