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성공보수, 유전무죄·무전유죄 오해 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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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큼이나 사회구성원들이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법원의 ‘형사 사건 성공보수 무효’ 판결에서 대법관 4명(민일영·고영한·김소영·권순일)이 보충의견에 인용한 법조계 격언이다. “적잖은 국민이 유전무죄·무전유죄 현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회 풍토에서 형사 성공보수는 형사사법의 공정성과 염결성(청렴결백함)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증폭시켜 왔다”고 제시한 뒤 이어진 말이다. 형사 성공보수가 ‘전관예우’ 논란을 불러 재판 불신을 키운 뿌리라고 본 것이다.

 ‘계약자유의 원칙’을 헌법적 가치로 봐 온 대법원이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형사 사건 성공보수 계약에 대해 “반(反)사회질서적 법률행위”라고 못 박은 것은 국가 형벌권의 행사가 금전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동안 대법원이 민법 제103조 위반(반사회질서적 법률행위)으로 본 것은 ▶첩(妾)을 들이는 계약 ▶사기성이 있는 부동산 이중매매 계약 ▶유리한 법정 증언의 대가로 거액을 받기로 한 계약 등이다.

 대법원은 우선 “일정한 수사·재판의 결과를 ‘성공’으로 보는 것 자체가 사회적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성공’이 부적절한 방법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모면한 것이면 사법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고, 반대로 원래 당연한 결과라면 성공보수를 지급한 의뢰인은 억울함과 원망을 갖게 될 것”이란 얘기다. 나아가 “변호사는 수사·재판담당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에 빠질 위험이 있고, 국민이 수사와 재판 절차가 정의 실현이 아니라 ‘돈의 유혹이나 검은 거래’에 좌우된다고 의심한다면 법치주의는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고 제시했다. 대법원은 변호사 직무의 독립성이나 공공성이 훼손될 위험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등 대법관 13인의 전원일치 의견을 내기까지 대법원 내부에선 격론이 일었다고 한다. 당초 16일로 예정됐던 선고가 연기돼 23일에 이뤄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형사 사건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혁명적 판결인 만큼 전원일치를 이뤄야 한다는 게 대법관들의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주심인 권순일 대법관이 산파 역할을 했다. 대법원은 특히 보안 유지에 신경을 썼다. 상고를 했던 변호사가 상고를 취하하면 선고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그간 어떤 변호사도 의뢰인을 대리해 성공보수가 무효라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며 “성공보수 분쟁은 상고 자체가 드물어 보안 유지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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