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제에선 국회가 의제 설정 … 미국도 의회에 결정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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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호 03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뜰의 국회 깃발이 27일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최정동 기자

미국의 입법제도를 관통하는 독창적인 생각은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의 원리다. 이 원리는 주요 의사결정자들에게 거부권을 부여해 일방(특히 다수)의 입장을 타방(소수)에게 강요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사결정 규칙에서는 거부권을 가진 행위자들이 서로 동의하지 않으면 최종적인 결정이 만들어질 수 없으므로, 거부권 행사자가 수용할 수 있는 결정만 이뤄진다.

[대통령 거부권 정국] 비교정치학으로 본 국회법 개정안

미국 대통령제에서는 입법부가 먼저 법안을 만들어 행정부에 제안하고, 행정부(대통령)는 입법부가 제안(발의)한 법안에 수정을 요구하지 못한다. 그 제안을 받을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take it or leave it)만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의사결정 규칙에서 먼저 제안하는 측을 ‘의제 설정자(agenda setter)’라고 부른다.

즉 미국 대통령제에서는 의제 설정자인 의회가 제안한 입장에 대해 거부권 행사자인 대통령은 거부와 수용 중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회제(내각책임제)에서는 행정부가 법안을 제출하고, 의회는 동의 여부(거부권)를 결정한다(행사한다). 따라서 미국의 대통령제에서는 의회가 의제 설정자인 반면 의회제에서는 행정부가 의제 설정자가 된다. 일반적 통념과는 반대다.

미국 행정부는 입법부 결정 집행 대리인
미국 미시간주립대 정치학 교수이자 정치제도 연구의 거장인 조지 체벨리스의 거부권 행사자 이론은 입법부-행정부 관계에서 누가 의제 설정자가 되느냐에 따라 입법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제 설정자가 법안을 제안하면, 거부권 행사자는 그 법안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수 없고, 단지 받을지 거부할지만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의제 설정자는 거부권 행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입장을 제안하게 된다.

체벨리스의 거부권 행사자 이론은 정부 형태의 이름과 상반된 입법 결과가 초래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대통령제에서는 의회가 선호하는 입장이, 의회제에서는 행정부가 선호하는 입장이 각각 선택된다는 것이다. 경험적이고 비분석적인 시각에서는 대통령제에서의 입법권은 늘 대통령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론 그와 정반대로 대통령제에서의 입법 권한은 의회에 놓여 있다.

미국 대통령제에서 입법적인 권한을 이처럼 의회에 부여한 이유는 입법부가 의사결정의 주체(principal)이고, 행정부는 입법부의 결정을 집행하는 대리인(agent)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미국 대통령제에서 행정부-입법부 관계는 입법주체인 입법부가 의제설정을 하고, 이에 대해 행정부는 소극적인 거부권만 행사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 입법제도는 거부권 행사자의 권한을 무력화할 수 있는 규칙을 마련했다. 의회 다수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의회의 초다수인 3분의 2가 동의하면 대통령의 거부권을 기각할 수 있다. 이러한 규칙은 의회의 다수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정부에 부여하되, 입법 주체 대부분이 동의하는 입장에 대해선 행정부도 따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헌법 75조, 무분별한 행정명령 제한
물론 미국 대통령도 행정명령(executive order)을 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권한은 대통령의 고유한 입법권한이 아니라 의회가 제정한 법(primary legislation)을 집행하기 위해 위임된 부수적인(delegated and secondary) 권한에 불과하다. 따라서 입법주체인 의회가 입법 대리인인 행정부의 명령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제도가 미국식 삼권분립 원칙에 이론적으로 더 부합한 제도다.

우리나라의 현행 헌법 제75조는 이 원리를 매우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법률이 위임한 사항과 법률 집행에 필요한 사항에서만 대통령령을 발할 수 있으며, 법률이 대통령령의 구체적인 범위까지 정하도록 했다. 이는 군사정권 시절 무분별하게 남용되던 행정명령에 제한을 가해 삼권분립의 원칙과 법치주의를 추구하기 위한 조항으로 해석돼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일부 측면에서 미국의 순수한 대통령제보다는 행정부가 의제설정을 하는 의회제와 닮았다. 한국은 국회뿐만 아니라 행정부도 법안을 발의할 수 있다. 국회가 법안을 발의하는 경우 대통령은 이를 수정할 수 없고 거부권만 행사할 수 있으므로 제도적으로는 국회가 의제 설정자다. 그러나 대통령이 다수여당을 장악한 경우 대통령이 입법적인 의제설정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여당은 대통령이 선호하는 법안을 수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대통령은 여당을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인 무기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토대로 국회가 여대야소일 땐 의회제에서의 일당 다수정부의 총리가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의제 설정권한을 지니게 된다.

행정명령에 대한 대통령의 의제 설정권한은 행정명령에 대한 국회의 수정권한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 국회가 행정명령에 수정을 가할 수 있으면 대통령은 행정명령에 대한 의제 설정권을 상실한다. 둘째,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발하고 의회가 이를 수정할 수 없고 승인만 할 수 있다면, 대통령은 행정명령에 대한 의제 설정자가 된다. 이 경우 대통령(행정부)은 의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 중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입장을 제안할 수 있다. 셋째, 대통령이 의회가 위임하지 않은 포괄적인 영역에서 행정명령을 발할 수 있고 국회가 행정명령에 대해 수정 또는 승인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면 대통령은 견제 없는 행정명령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세 가지 경우 가운데 첫 번째가 대통령제의 삼권분립 원칙과 가장 부합한다. 두 번째 경우는 의회제와 유사한 제도다. 세 번째 경우는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나 승인이 불가능한 제도로 삼권분립에 가장 위배된다.

미국식 대통령제가 순수한 권력분립 제도를 채택했다면 후발 대통령제 국가들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해 미국 대통령제의 제한적인 행정명령 권한을 다양한 방법으로 강화시켰다. 미국의 두 정치학자 매슈 슈거트와 존 케리는 비교정치학적 관점에서 세계 44개 정권의 헌법 분석을 통해 대통령의 행정명령 권한을 계량적으로 측정한 바 있다. 이들은 행정명령에 아무런 제약이 없으면 4점, 제약은 거의 없지만 임시적인 행정명령 제도는 2점, 제한된 행정명령 제도는 1점, 대통령에게 행정명령 권한이 없는 경우는 0점을 각각 부여했다. 그 결과 29개 정권이 0점, 11개 정권이 1점, 3개 정권이 2점으로 각각 나왔다. 4점을 받은 유일한 사례는 1988년 브라질의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슈거트와 케리는 한국의 제헌헌법, 제3공화국 헌법, 그리고 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에 명시된 행정명령 권한에 각각 1점을 부여했다. 그들의 시각엔 현행 헌법 제75조가 제한적인 행정명령 권한을 규정하는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토론·타협으로 입법·행정부 갈등 해소
이론적인 시각에 의하면 순수한 대통령제는 의회에 법안 발의권과 수정 권한을 부여한다. 따라서 삼권분립에 충실한 입법제도는 의회가 법안 및 행정명령에 수정을 가할 수 있는 제도다. 대통령이 포괄적인 영역에서 행정명령을 발할 수 있고, 행정명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 또는 승인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면 한국 대통령은 어떠한 국가보다도 막강한 행정명령 권한을 가지게 된다.

케리에 의하면 대통령의 의제 설정권과 행정명령권의 중요한 차이는 토론과 타협을 허용하는가이다. 대통령이 의제 설정권을 가지면 행정부와 입법부가 토론과 타협을 통해 선택된 정책 대안 가운데 대통령이 원하는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반면 행정명령권은 대통령이 의회와의 토론이나 동의를 거치지 않은 대안을 자신의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케리는 민주주의에서 토론과 타협은 그 자체로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갈등을 해소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견제 없는 행정명령권은 입법부와 행정부가 해소할 수 없는 갈등과 교착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행정명령권을 둘러싸고 입법부와 행정부가 교착하고 있는 한국의 현시점에서 케리의 이러한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문우진 고려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미 UCLA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게임이론·선거제도·공간이론이 전문 분야. 저서로는 『Position versus Valence』(2009), 논문으론 ‘대의 민주주의의 최적화 문제와 헌법 설계: 정치거래 이론과 적용’(2007) 등. 현재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정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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