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총은 신임, 朴心은 사임 … 유승민, 여론 살피며 거취 장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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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호 05면

27일 국회 본관 앞의 새누리당 원내대표 주차공간이 비어 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날 모처에 머물며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최정동 기자

청와대의 사퇴 압박에 이어 친박계 의원들까지 집단행동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27일 본인의 향후 거취를 놓고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대통령 거부권 정국] 갈등의 골 깊어진 당·청 관계

유 원내대표는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을 피한 채 이날 새벽에 자택을 떠나 모처에 머물다가 오후에 지역구인 대구로 내려갔다. 측근들은 유 원내대표가 전화를 이곳저곳으로 돌리며 당내 의원들과 대응 방안 등을 놓고 장시간 의견을 나눴다고 전했다. 새누리당이 지난 25일 의원총회에서 유 원내대표를 사실상 재신임한 데 이어 26일 유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께도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사과까지 했지만 청와대의 퇴진 요구가 더 거세졌기 때문이다.

서청원·김태환·윤상현 의원 등 친박 핵심 의원 8명은 26일 긴급 회동을 하고 29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기로 했다. 여기에 친박계로 분류되지 않은 이인제·김태호 최고위원까지 당·청 관계 회복을 위해 유 원내대표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이 최고위원은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정치적 책임은 결과에 대해 국민에게 지는 책임”이라며 “(유 원내대표의) 사퇴가 정도”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친박계인 서청원·이정현·김을동 최고위원에 이인제·김태호 최고위원까지 최고위원 8명 중 김무성 대표와 원내 지도부를 제외한 5명 전원이 사실상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동료 의원들 유승민에 “흔들리지 말라”
유 원내대표 측은 청와대와 친박계 의원들의 계속된 사퇴 압박에 대해 물러날 뜻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미 당 의총을 통해 재신임을 받았고 의원들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에게 사과도 한 만큼 그만둘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조해진 당 원내수석부대표는 27일 중앙SUNDAY와 통화에서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선출된 대표고 의원총회에서 다시 신임한다고 했으면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며 “다른 기구(최고위원회의)에서 똑같은 얘기를 다시 하는 것은 의원총회의 결정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동료 의원들로부터도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라는 연락을 받고 있다”고도 했다. 청와대의 사퇴 압박에 대해선 “당·정·청이 한 몸이 돼 가는 건 당연한 것이고 대통령께서 마음을 풀도록 부탁을 드린 것도 그런 하나의 과정”이라며 “시간이 걸리겠지만 유 원내대표나 원내지도부에서도 당·청 관계 회복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유 원내대표와 가까운 한 새누리당 의원은 “유 원내대표가 이번 사안을 단순히 원내대표 자리를 그만두는 문제라기보다는 정상적인 당·청 관계라든지 입법부와 행정부 간 관계 재정립이 필요한 거 아니냐는 고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과의 관계 회복 어려울 듯
친박계 의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관철시키겠다는 입장이다. 김태흠 의원은 “당·청 관계는 한마디로 회복불능 상태”라며 “유 원내대표가 그렇게 공개 사과를 했는데도 박 대통령이 요지부동인 것은 직장으로 치면 권고사직이고 연인 사이로 말하면 이별을 통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고위 결과를 지켜보고 유 원내대표가 끝내 사퇴하지 않는다면 의원총회 소집을 요청하는 등 사퇴를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했다.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둘러싼 당내 기류는 복잡하다. 영남권의 한 재선 의원은 “당과 청와대 사이에 이렇게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결국 유 원내대표가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며 “결자해지 차원에서 본인이 물러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반면 수도권의 한 의원은 “당이 분열돼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옛날처럼 청와대가 하는 말을 당이 그대로 복종해 국민에게 당·청 관계가 수직적으로 비쳐지면 내년 총선은 어떻게 치르겠느냐”며 “딜레마에 빠졌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과 유 원내대표 간 ‘애증’의 관계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은 초선 의원인 유 원내대표를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유 원내대표는 이후 2007년 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정책메시지단장을 맡으면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선봉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둘의 인연은 악연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유 원내대표는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변경에 반대하는 등 박 대통령과 수차례 대립했다. 이때부터 유 원내대표는 ‘원박(원조 친박)’에서 ‘멀박(멀어진 친박)’으로 불렸다. 지난 2월 원내대표로 취임한 뒤에도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공약가계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점을 반성한다”며 청와대와 다른 길을 걸었다. 이번에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유 원내대표를 비난한 것도 그동안 쌓여왔던 갈등이 폭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 친박계 의원은 “대통령 입장에선 몇 년 동안 모였던 앙금이 이번 국회법 개정안 논란을 통해 터진 것”이라며 “유 원내대표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만큼 예전처럼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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