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0)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03)|박종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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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끝으로 시를 쓰다가 늦게 소설가로 등장한 월탄 박종화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월탄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금삼의 피』를 시작할때 많이 나왔으므로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
가람 이병기는 유명한 시조시인이다. 그는 안서 김억과 가까운 사이이고 해방전에는 휘문고보에서 한글을 가르쳤고 해방후에는 서울대교수를 지냈다. 서울대학교때에는 여학생이 많이 있는 국문학교실에서 아슬아슬한 음담을 섞은 강의를 해 유명했다.
그는 월탄집 술자리에는 반드시 초청되어 우스갯소리와 음담을 늘어놓으면서 술을 마셨는데 가람은 항상 월탄을 가리켜 『월탄은 완복지인이야』하고 치켜세웠다. 완복지인이란 말은 오복을 갖춘 사람이란 뜻이다. 첫째, 장수 하고 둘째, 부모가 구존하고 셋째, 형제 자매가 다 무고하게 잘있고, 넷째, 현숙한 부인밑에 자녀가 많고 다섯째, 집안이 부유하여 굽힐데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이병기는 설명하였다.
월탄도 이것을 인정했는지 해방전 조선일보에 『여심악』이라는 수필을 썼다. 『옛글에 일렀으되, 아버님 어머님 함께 살아계오시고 형과 아우 연고없음이 한 악이라 하였더라』로 시작되는 이 득의의 글은 그때 문단에서 다복한 사람의 표본으로 선망의 적이 되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빈궁한 문사들의 선망의 적이 된 것은 그의 재력이었다. 그는 많은 분재를 받아서 부명을 들었으므로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빈한한 문사와는 그 유가 달랐다.
몇푼 안되는 월급을 타서 처자를 먹여 살리느라고 마음에 없는 월급장이가 된다든지, 또는 원고료를 바라고 글을 써서 편집자에게 애걸하고 다니는 문사들의 신세가 아니라 내가 쓰고 싶으면 쓰고 쓰기 싫으면 안쓰는 팔자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빙허에 앞서 조선일보 사회부에 취직하였다가 며칠도 못가 아니꼽다고 나와버렸다. 그때 별따기보다도 더 힘든 신문기자가 되었으면 감지덕지해서 다닐 것인데 아니꼽다고 튕기고 나와버린 것은 그의 튼튼한 재력때문이었던 것이다.
월탄에 대해서 안서 김억과 춘해 방인량, 그리고 나중에는 청전 심산같은 화가들이 「조주술」이란 것을 가끔 썼다. 이네들은 술을 마시고 싶으면 가는데가 대개는 한잔에 5전하는 선술집이 아니면 한층 올라 한상에 80전하는 앉은 술집이 고작이었다. 보료위에 버티고 앉아 기생을 불러놓고 떵떵거리면서 술을 드는 요리집에 갈 기회가 있을리 없었다.
더구나 춘해는 『조선문단』시대에 흥청망청하고 요리집에 드나들던 사람이었던만큼 요리집에 대한 향수는 더 간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춘해와 안서가 모여 월탄한테 술한잔 낼테니 나오라고 전화를 건다.
이렇게 월탄을 꾀어 선술집이나 앉은 술집에 가 한잔을 내면 술이 거나해진 월탄은 이번엔 내가 한잔 낸다고 호기를 부리고 이 사람들을 데리고 요리집으로 간다.
월탄이 단골로 가는데가 어딘고하니 종로에 있는 대서관이 아니면 천춘원이었는데 이 두 요리집에서는 월탄을 환영하였다.
외상값을 틀림없이 갚아주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월탄한테 작은 낚시밥을 던져 큰 술을 낚아 먹는다는 「조주술」이란 것인데 안서 김억이 지은 새술어다. 월탄은 물론 이것을 알고 기꺼이 그들의 조주술에 응했는데 화가패에서도 묵로나 정재는 물론이고 청전·심산도 이런법을 써 월탄의 요리집 술을 뺏어 먹었다.
이렇게 월탄은 문단에서 가장 돈 많은 유복한 사람으로 김동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문은 궁야라』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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