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인사이드 피치 228. 도루의 귀재 박재홍 "WBC 불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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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역시 박재홍(SK)은 '스틸(steal)'의 귀재다. 그는 지난해 8월 27일 문학 삼성전 4회 말 2사 3루에서 모두의 허를 찌르는 단독 홈스틸에 성공했다. 당시 삼성과 치열한 1, 2위 다툼을 벌이던 SK는 박재홍이 홈을 훔쳐낸 데 힘입어 0의 균형을 깨고 기선을 잡았고, 결국 4-3으로 이겼다. 박재홍은 그만큼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타이밍을 뺏는 데 천부적이다.

그런 박재홍이지만 이번에는 훔쳐서는 안 되는 걸 훔친 것 같다. 프로야구계의 정의감, 스포츠맨다운 정직과 소신이 박재홍에 의해 도난당한 것 같다. 그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불참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보면 그저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할 뿐 대표팀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하겠다는 소신은 찾아볼 수 없다고 느껴진다.

박재홍의 입장에서는 아파서 못 뛰겠다는데, 정말 뛰고 싶고, 나라를 대표하고 싶지만 그래봐야 대표팀에 민폐만 끼칠 것 같아 불참을 결정했다는데 왜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정말 그럴까.

박재홍이 대표팀에 "못 뛰겠다"고 의사를 밝힌 것은 6일 인천 길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뒤다. 6일은 박재홍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으로 소속팀 SK와 4년간 최대 30억원에 계약하기로 합의한 이튿날이다.

박재홍은 지난해 12월 8일 예비 엔트리 60명의 1차 발표 때 불참 의사를 밝힐 수 있었다. 그는 8월 9일 LG와의 경기에서 슬라이딩을 하다 왼손을 다쳤다. 최근에 다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상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에도 기회는 있었다. 12월 20일 30명의 최종 엔트리가 발표됐을 때다. 그는 그때도 아무 말이 없었다.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그때라도 불참 의사를 밝혔더라면 다른 선수에게 준비할 시간을 좀 더 줄 수 있었다.

예비 엔트리와 최종 엔트리 발표 때 침묵했던 그가 계약을 하고 나서 병원을 찾고, 불참을 결정하니 그 진실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5일 30억원짜리 계약 직전까지 아프지 않던 손가락이 도장을 찍고 나니 아프게 된 걸까. 아닐 것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계약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니고, 몸 만들기에 소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약을 하고 나니 무리해 대표팀에 가봐야 '생기는 것'도 없는데 차라리 몸에 신경 써 팀과 맺은 옵션을 채우는 게 이롭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박재홍은 이번 불참 결정으로 국가대표팀은 물론 프로야구 전체의 미덕, '정의감'에 흠집을 냈다. 한마디로 '물'을 흐렸다. 그래도 박재홍이 진짜 아픈 걸 거라고 믿고 싶다면 두고 보자. '인사이드피치'는 박재홍이 '정상적으로' 시즌 개막전에 출전한다는 쪽에 건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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