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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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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리스 신화의 키프로스 왕 피그말리온에게는 여성 기피증이 있었다.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여성에겐 결점이 많다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속세의 여성과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아로 이상형을 조각하는 일에 몰두했다. 사랑을 단념하는 대신 대리만족을 추구한 것이다.

탁월한 조각가였던 그가 창조한 여인상은 아름다웠다. 그걸 그는 끔찍이 아꼈다. 날마다 꽃을 바쳤고, 보듬고 어루만졌다. 그러는 사이 소망이 생겼다. 조각이 사람이었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그는 소원을 비는 축제일에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을 찾았다. 그리고 조각상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여인상이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 여인과 결혼했고, 딸 파포스를 낳았다. 그의 여성관도 달라졌다.

여기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이 나왔다. 꿈과 소망을 가지면 현실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19세기 영국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는 이 신화를 그림으로 그렸다. 영국 버밍엄 미술관엔 그의 '피그말리온 조상' 4부작이 걸려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 "사람들이 '와!'하고 감탄하는, 그저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그런 대작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한다.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경탄의 눈으로 감상하는 걸 보면 그의 소망도 피그말리온처럼 성취된 셈이다.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신년사에서 "강한 희망은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월드컵과 외환위기 극복에서 경험한 바 있다"며 "올해 모두가 정성을 다하고 간절히 소망하면 어떠한 꿈과 목표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해에 경제든, 뭐든 잘될 것이라고 소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재산보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했듯 꿈과 희망이 없다면 어디 살맛이 나겠는가.

그러나 그간 국민의 소망이 부족해서, 또는 희망이 약해서 경제가 부진했고, 정치가 불안했던 것일까. 우리의 삶이 팍팍했던 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정부와 정치권의 정성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참여정부는 왜 국민의 지지를 많이 상실했는지, 정치권은 왜 여전히 불신을 받는지 새해엔 그것부터 반성해 볼 일이다. 국민이 정부와 정치권에 희망을 걸지 않는 한 경제부총리가 기대하는 피그말리온 효과는 쉽사리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상일 국제뉴스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