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라인 폭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폭탄 파이프라인-. 말만 들어도 신기한 무기다. 폭탄이긴 하되 파이프라인 같은 모양을 한 것이다.「파이프라인」이라면 보통 원유공급 파이프라인이거나 수로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폭탄파이프라인은 물이나 원유대신 폭발성 액체로 채워진다.
지금 미 국방성은 동서유럽의 경계선을 따라 이걸 매설할 것을 나토에 촉구하고 있다. 그게 서독과 한국에서 이미 실험을 거쳤다는 게 더 암시적이다.
서독에서의 실험은 바르샤바군의 서유럽 침공을 상정한 것이지만 한국에서의 실험은 북괴군의 남침에 대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실험결과는 『탱크 등에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15㎝ 굵기의 파이프라인이 직경 12m,깊이 4m의 웅덩이를 파 놓았다.
그건 대전차방호벽의 기능과 맞먹는 것이다. 서울의 북부도로에 무수하게 설치된 콘크리트조 방호벽은 적의 내침 때 고의로 폭파시켜 길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것. 방호벽과는 대개 5시간정도 기갑부대의 진출을 지연시키도록 구상되었다.
폭탄파이프라인은 그걸 충분히 대치할 수 있을 만하다. 그건 커다란 전술상의 의미가 있다. 개전 초 5시간정도의 적침 저지는 전황을 일변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시간여유를 준다.
그러나 폭탄파이프라인의 아이디어는 다분히 재래전술의 답습이다.
프랑스의 육군상 「마지노」는 당시의 과학을 총동원해서 독일군의 공격에 대비한 대요새선을 구축했다. 1936년에 완공된 마지노선이다.
그러나 그 「난공부락」의 요새선은 2차대전 개전과 함께 독일군에 의해 간단히 돌파됐다.
「우회공격」이나 항공기의 출현은 그런 축성술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맥나마라」계획도 있다. 미군이 월남전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그는 베트콩 출몰 지역에 전자감지장치를 설치해 그들을 격퇴할 아이디어를 짜냈었다.
하지만 그런 아이디어는 효용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산됐다.
중세시대 유럽의 성곽 주변이 반드시 수로로 둘러쳐져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성들도 거의 해자로 둘러쳐져 있었다.
웅덩이를 파서 적의공격을 막고, 혹은 웅덩이를 은폐했다가 적장을 유인해 빠뜨려 잡는 수법은 상투적인 고대전의 전술이었다.
물론 지금의 「웅덩이」 전술은 장수나 군마 대신 시간을 잡아두는 데 뜻이 있다.
핵무기와 킬러위성이 출현한 현대전의 시대에 「폭탄 파이프라인」같은 낡은 전술 개념이 등장하는건 역세적이지만 재미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