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블라이스」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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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내가 영문과 l학년때 들은 강의중에서 지금까지 인상에 남아있고, 또 유익했던 강의는 「불라이스」선생의 영문학사·영작문강의와 茂亭 정만조선생의 역대시선 강의였다.
「불라이스」선생의 영문학사 강의는 시대별로 그 특징을 요령있게 설명해가서 나중에 책을 읽으면 환하게 알수 있게 된 강의였는데 그보다도 유익한 것은 영작문 시간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공부를 할셈으로 춘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안서·요한·수주·파인의 시를 1시간에 하나씩 번역해냈다. 「블라이스」 선생은 점심시간에 나를 불러 같이 벤또 (도시락의일본말)를 먹으면서 친절하게 시를 고쳐주었다. 선생은 집에서 벤또를 싸가지고와 먹는데, 검은찬합같은 밥그릇에 흰쌀밥을 담고 옆에다 연근이나 우엉같은 채소반찬을 넣었다.
선생은 채식주의자여서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흰나무젓가락을 재치있게 놀려 천천히 밥을 떠넣어가면서 번역의 서투른 점을 설명해갔다. 선생이 제일 잘되었다고하는 시는 정지용과 임화의 시였다. 정지용의 시를 다읽고 나서 이사람이 영국의 낭만파 시인「존·키츠」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다. 내 번역은 물론 엉망이었을 것이고, 선생은 내 번역을 다읽고 나서 시 전체의 뜻을 파악하고 난후 한 말이었다.
그때의 많은 시인과는 달리 정지용은 일본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서 영시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글재주만을 가지고 시를 써가던 그때의 시인들과 달라 정식으로 영시를 공부한 사람이었던것이다.「블라이스」선생은 런던대학 재학중에 제1차 세계대전을 당하였다. 출전하라는 징집영장을 받고 그는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 나갈수 없다고 하여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얼마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뒤에 우연히 이대학에 유학하러 온 「후지이」(등정) 라는 경성제대 영어선생을 만나서 그의 권유로 대학 예과의 전임교수로 취임하여왔다.
그는 서울로 와 청량리 대학예과에서 멀지않은 산언덕에 양옥을 짓고 개·소·양등을 기르며 살았다. 부인은 런던대학의 동창으로 머리가 남편보다 더 좋다는 소문이 있었다. 부인은 경기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때 학생에 이인수가 있었다. 부인은 영어를 잘하는 이인수를 귀여워해서 청량리집에 데려다 같이 살았다.
그뒤 얼마 안가서 선생은 부인과 이혼하여 부인을 영국으로 보내고 일본여자와 결혼하였다. 일본부인은 그때 충무로에 있던 히라다 (평전) 백화점의 여점원이었다. 집을 옮겨 이화동에 살면서 선생은 장소동에 있는 일본절 묘심사에 다니면서 화산이라는 일본중한테서 선을 배웠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대학을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신호에 있는 외국인 수용소에 억류돼 있었고, 종전후 이곳에서 풀려나와 학습원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일본황태자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64년에 별세하였다.
한편 「블라이스」 부인은 이인수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 이인수를 공부시켜 훌륭한 영문학자를 만들었다. 이인수는 해방후 고려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6·25사변때 부역하였다는 죄목으로 아깝게도 처형되었다.
런던에서 이 소식을들은 「블라이스」 부인은 몹시 애통해 하였다. 친아들같이 사랑해서 길러낸 그이었던만큼, 또 그의 처형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던만큼 「블라이스」부인의 애통해함은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이인수의 죄목은 사변중에 영어방송을 했다는것인데, 이방송은 본의 아니었던것이 판명되었고, 김성주를 비롯한 여러사람의 구명운동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처형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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