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7)경제연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그때 「미야께」(삼완)교수의 강의가 하도 유명하므로 어느날 나는 그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그교실에 들어갔었다.
넓은 강의실이 조선학생으로만 꽉 차있었는데 「미야께」교수는 노트는 하나도 시키지않고 입담으로만 강의를 해 나갔다.
웃저고리를 홀딱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 바람으로 교단을 왔다갔다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르크스-엘겔스」의 사상을 강의하는 것이었다.
열렬한 명강의인듯 싶었다.
나는 신입생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터이지만 가만히 「미야께」교수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주위를 돌아다보니 법과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철학과·사학과의학생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들 경제연구회는 학교당국에서 지도교수까지 붙여주고 합법단체로 허가해 주었으므로 회원개인의 집에서 모이지 않고 대학식당에 모여 연구발표와 비판·토의를 가졌고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시사문제도 토의하게 되었다.
내가 학부에 올라가기 전인 1929년 1월에 원산의 부두노동자들의 대파업이 있었는데 그때 법과 2학년이었던 최×달이 이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 현지로 파견된 일이 있었다.
최의 고향은 원산에서 멀지 않은 양양이었다.
최는 원산부두노동자의 대파업사건을 조사해 온 조사보고서가 잘되었다하여 나중에 이보고서가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에서 젊은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삼목청이 주재하던 『신흥과학의 깃발아래로』라는 갑지에 발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산부두 노동자의 대파업은 노동자 1천4백여명이 노동조건의개선을 조건으로 내세워 1월에 시작해 4월까지 줄기차게 싸워온 우리나라에서 일찌기 없었던 대파업으로 일본에까지 유명해진 노동쟁의였다.
나는 영문과학생이므로 이런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신문에서 날마다 대서특필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때 유진오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제일고보때부터 한반이던 영문과의 이재학과 법과로 한반 아래인 최×달·이×국·박×규등이었다.
내가 1학년에 들어갔을때 이재학은 졸업해 나갔으므로 보이지 않았고, 나머지 세사람은 3학년 재학중이었는데 이들과 유진오는 학생공실이라는 학생 휴게실에서 자주 탁구를 하고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나중에 유진오가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에 탁구하는 태도가 세사람의 성격을 잘 나타낸것 같았다고 하였다.
최는 성실하게 공을 받아넘기고 별로 공격도 얀하는 신중한 타입이지만 이는 막덤벼서 공격만 해대는 화려한 플레이를 했었다.
그대신 잘못하면 여지없이 패해버리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박은 끈질기고 빈틈이 없어서 이가 박한테 덤비면 그 끈질긴 수비에 그만 손을 들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45년 해방이 되던날 새벽 5시에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위의 작은 언덕에 세사람이 여운형을 기다리며 나란히 서있는것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것을 기억한다.
그때 이는 혼자서 껄껄대며 웃고 떠들었고, 최는 일상때같이 근엄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었고, 박은 떠들어대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뒤로 그들을 못만났는데 이것이 40년전의 일이되었다.
그들은 그때 여운형과 건국동맹의 지하운동을 하고있었는데 해방이 되자 이×은 미군의 진주이전에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것을 만들고 여간첩 김수임을 애인으로 삼아 미군의 갖은 비밀을 다 뽑아내고 이북으로 넘어가더니 얼마못가서 김일성의 손에 처형되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