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5>제80화 한일회담(254)|시이나외상방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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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2월17일의 「시이나」 외상의 방한을 며칠앞두고 내가 귀국할때는 기본관계위원회는 사실상 모든 매듭을 지었다.
대한민국의 합법성문제와 구조약무효조항도 실무선에서 대강의 합의가 성립됐으나 한일외상회담의성과를 올리기위해 미해결쟁점으로 남겨뒀던 것이다.
한일양국의 반대움직임이 「시이나」 외상의 방한을 계기로 한층격렬해진 상황을 고려한 조처였다.
일본사회당은 외상불신임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좌익계열의시위는 조직화되어갔다.
국내에서도 야당의 굴욕외교반대투쟁위가다시 활동을 재개, 전국적인 반대유세에 나설 형국이었다.
따라서 양국정부는 서로 국내의 반대움직임을 향해 각기 국익을 위해 최후까지 유리한 방향으로 사력을 다해 교섭에 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필요성이 있다는 묵계가 성립됐던 것이다.
「시이나」 외상은 이같은 배경을깔고 17일하오1시30분 수행원들과 함께 해방후 처음으로 일장기가 펄럭이는 김포공항에 JAL특별기를 타고 도착했다.
그는 공항도착성명을 통해 『한일양국의 공동관심사에 관해 흉금을 털어놓고 간담할 것을 기대한다』 고 말하고 『양국간의 오랜 역사중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다』라고 말했다.
해방이후 일본의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지도자가 그들의 과거 한국통치 행위에 대해 이같은 반성을 공식적으로 표하기는 처음이었다.
민주당 정권 시절인60년 가을에 방한했던 「고사까」(소판)외상이 『과거의 관계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만 말했던 전례를 생각하면 대단한 자세변화였다.
이같이 일본의 자세가 한걸음전향적이 되기까지의 외교교섭은실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나는 기본관계교섭과 범행해 「시이나」 외상의 방한도착성명교섭을벌였다.
처음에 그들이내놓은안은「고사까」외상의도착성명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본부는 물론이지만 나도 결코 그것을 받아들일수 없다고 말하고 이제 새로운 양자관계의 출발을 하려는 마당에 마땅히 일제통치에 대한사과표현이 들어가야 우리국민이 납득할수 있을 것이라고 강력히요청했다.
본부는 또 본부대로 외기파견형식으로 서울에 주재하던 「마에다」 (전전리일)관방청조사관(현주한일본대사)등에게 도착성명에 사과표현이 포함돼야한다고 거듭요청했다.
「마에다」조사관동은 이같은 우리요청을 수도없이 본부에 타전했으나 끝내 만족할만한 회답이 없어 볼펜을 집어던지기조차 했다고한다.
일본측은 사과한다는 표현을 인정할 경우 한국측의 청구권주장을 정당화하는 법률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우리때문에 최후 순간까지 버텼다고 한다.
우리측의 외교적공세에다 그렇다면 「시이나」 의상의 방한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극단의 논조가 국내언론에 보도되자 「시이나」외상도 뭔가 결단을 하지않을수 없었다.
「시이나」외상비서관「오오모리」(대삼성일) 씨의 회고에 따르면 「시이나」외상은 16일 「이께다」전수상을 문병하고 방한사정을 설명했는데, 자리에서 「이께다」 전수상이 『군이하는일에 기대를 건다. 안심하고잘하라. 내가 도울수 있는한 돕겠나』 고 격려했다.
「시이나」외상은 이에 용기를 얻었는지 「사또」수상조차도 「깊이 반성」 표현에 국회가 염려된다고 회의적반응을 보였음에도 결단을 내렸다고한다.
직업외교관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직접 이 귀절을 삽입한 그는 외무성기자실에 들러 짐짓 반응을 떠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오오모리」씨의 평가로는 한일회담이 성공한 두가지 요인의 하나로「시이나」외상의 이 결단을 지적할만큼 어려운 고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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