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어버린 쑥·민들레 갓털서 간날과 올날을 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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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차례 비 지나간후 꽃이 진 나무들은 한층 푸르러지고 양지쪽에서 다보록이 자라던 쑥은 대궁이 한섬만큼이나 부쩍 올라왔다
아마 올해로는 마지막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흠씬 향기를 맡으며 쑥을 뜯고 있는데 지나가던 이웃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걸 뭣하러 뜯으세으 다 쇠어서 이젠 못먹어요 』
올봄에는 꽤 여러 차례 집 부근 빈터나 야산에 돋아난 어린 쑥을 뜯은 셈이다 햇빛 환한 창에 얼굴을 대고 밖을 내다보노라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쑥을 뜯던 이웃집 엄마들이 소리쳐 부르곤했다. 『좀 나오세요. 그렇게 집안에만 있으니까 얼굴이 쇠지요 』 풀리지 않는 생각, 써지지 않는 글을 잠시 밀쳐 두고 밖으로 나가 무딘 손칼로 소꿉놀이하듯 쑥을 캐노라면 소근소근 건네지는, 아낙네들의 저마다 살아가는 얘기에는 얼마나 정도 많고 한도 많은가
하긴 예부터 부녀자들의 나물캐기는 모처럼의 핑계좋은 행락이요, 해방이라잖던가
쑥개떡, 그것은 우리 또래 공통의 기억, 미각이다 점심이 없는 긴긴 봄날의 주람 끝에 어쩌다 먹을수 있는 간식이었고, 그래서 아이들은 자욱한 봄 들판에 엎드려 쑥을 뜯곤 했었다. 저녁 식탁에 쑥국을 올리면 오래도록 쑥향기가 집안에 감돌고 함께 상에 차려졌던, 먹으면 그대로 온몸에 푸른즙이 배어들 듯 풋풋한 산나물의 맛과 함께 봄은 이미 내게 어느 저녁의 향기, 혹은 미각으로 남았다. 시장거리에서 한움큼씩의 취나물, 산미나리, 참나물, 두릅 따위를 벌려놓은 시골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말하곤 했었다.
『범도 나오는 큰산, 대룡산 깊은 골에서 뜯은 거라오 거긴 아직 깝깝겨울이야. 양지쪽에나 겨우 풀이 돋았지』한약냄새가 나고 이상한 맛이 난다고 투정부리는 아이들에게 나역시 똑같이 그 말을 옮기며 설명했다.『호랑이가 사는 큰산에서 노루나 사슴이 뜯어먹는 풀들이야 이걸 많이 먹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튼튼해지지』
쑥을 뜯는다. 이미 떡도 할수 없고 국도 끓일 수 없이 쇠어버린, 한갓 잡초일뿐인 쑥을 뜯는 것은 단지 속절없이 가고 있는 봄에 대한 아쉬움에서인가.
바람부는 봄의 마지막 날들은 애절하기만 한데, 얼굴이 까맣게 그을은 아이들은 꽃진 민들레 갓털을 불어 날리고 있다.
바람결에 먼지처럼 분분이 날아 흩어지는 그것들은 기 여행 끝에 어느 흙속에 묻혀 싹을 틔우고 샛노란 금단추 꽃으로 첫봄을 맞으리라.
밤새 한뼘씩 자라올라 무성히 어우러질 쑥을 보며, 그 냄새에 취하듯 어지러이 이우는 봄빛속에서 나는 문득 지난 밤의 흐린 꿈을 더듬어 보듯 내 뒤에 그림자처럼 드리운 보이지 않는 세월들과, 내 앞에 놓인 안개 속처럼 몽롱하고 가뭇없는, 그러나 열심히 온 힘을 다해 살아가야할 나날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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