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 "생큐, 코리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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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만(맨오른쪽)·이해진(왼쪽에서 둘째)씨 부부가 2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필리핀 노동자들에게 목도리를 감아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다. [울산=사진작가 이재동씨 제공]

14일 오후 9시 울산시 무룡산 중턱에 위치한 외딴 음식점인 '들림집'. 식당 주인 김성만(66).이해진(59)씨 부부와 외국인 근로자 40여 명이 한데 어울려 이별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은 효동건설 소속으로 국도 31호선 확장 공사장에서 일해 온 필리핀 근로자들이다. 3년 동안의 도로공사가 이번 겨울 마무리돼 귀국을 앞두고 있다.

"돌아가면 꼭 편지 보낼게요."(랜드 부카.31)

"좋았던 기억만 간직해 줘. 자네들 돌아간다고 인연 끊어버리면 나 외로워진다고…"(김성만씨)

김씨 부부가 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추석이었다. 한국인 근로자들은 모두 고향으로 떠나고 식당 앞에 있는 숙소에서 쓸쓸히 추석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안쓰러워 식당으로 초대했다. 송편과 돼지 바베큐 등을 대접하며 한가위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이후 수시로 음식이나 양말 등을 전달했고, 설.추석 등의 명절엔 자신의 식당에 이들을 초대해 타국살이의 외로움을 달래줬다. 매년 연말에는 흑돼지 바베큐와 꿩고기를 준비하고 캠프파이어 파티도 열어줬다.

김씨가 시장을 보러 공사장 옆을 지날 때에는 이들 근로자들은 일손을 멈추고 "아이 러브 유"를 외치고 손을 흔들며 우정을 표시할 정도로 친숙한 사이가 됐다.

김씨는 국내의 어려운 이웃도 부지런히 챙겨왔다.

"1997년 고향인 원주의 '소쩍새마을'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젊었을 때 고향을 떠나 4남 1녀를 키우며 사느라 남을 돕는 일은 생각도 못해왔는데 넉넉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계속 미뤄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었죠."

소쩍새 마을에 연탄 100만 원 어치를 전달한 김씨는 해마다 추석과 설에는 돼지 한 마리씩을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조금씩 넓혀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인 충북 음성 꽃동네에도 돈과 음식을 수시로 전달한다.

2002년부터는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 기업체들의 협조를 받아 소쩍새마을과 꽃동네 수용자들을 자신의 식당으로 초청, 바베큐 파티를 열어주고 현대중공업 등 울산의 기업체를 견학시킨 뒤 경주 일원 관광을 하는 1박2일 패키지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일곱 차례에 걸쳐 약 1000명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갔다.

김씨 부부는 이날 작별파티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필리핀 근로자들에게 선물로 마련한 목도리를 일일이 둘러주며 "형편이 좀 나았으면 겨울용 방한복 한 벌씩이라도 입혀 보낼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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