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살림나는 아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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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날씬하고 얄밉도록 잘생긴 항아리에 고추장을 담았다. 암팡진 중간 항아리엔 된장을 담고, 투박하나 당당하게 생긴 항아리엔 찰랑찰랑 간장을 담았다.
이 봄에 새 며느리가 살림을 나는 것이다.
옛날 이야기지만 나의 시어머니께서 외출하시던 날은 왜 그리 마음이 홀가분했던지. 안계시는 동안 별다른 일 하는것도 아니었는데, 내내 보던 남편도 새삼스럽게 보이곤 했었다. 그런 지난 날의 추억도 남아있는 나였기에 같이 산다는 것이 웬지 며느리에게 미안한 느낌이 드는 때도 있었다.
시아버지와 같이 아파트계약을 마치고 돌아온 새 아기의 모습이 가벼워 보이는 것이 나의 지레짐작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동안 이라도 좋은 시어머니가 되어주어야 할터인데, 며느리와는 아들로 인해 맺어진 부모와 자식간이 아니던가. 앞으로 먼 인생, 내 아들의 동반자가 되어줄 사람. 그들의 앞날에 큰 어려움이 없기를 바란다.
봄별이 따사롭게 마루에 비추길래 나는 한햇동안 먹을 고추장을 버무렸다. 그리고 아주 제단지에 담았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염장을 얼마나 먹을까만, 또 저희들이 대견히 여길리도 없지만, 시어머니의 흔적으로 담아 보내는 것이다. 즐겨 먹는 반찬마다의 밑간이 되고 조미가 되어주는것으로 나는 만족하리라.
내 이들에게 무엇을 주어 기쁘게해줄수가 있을까. 사랑도 주어야 받을것이 있지, 내 생전에 어떤 변동이 없는 한 염장만은 내가 담가주고 싶다. 그리하여 여성의 슬기, 우리 맛의 자랑을 어떤 기계, 어떤 공장에도 빼앗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해임<서울강동구신천동장미아파트22동6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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